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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이와 일이 Aug 01. 2022

21화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길(19일 차)

  (2022.4.12. 화)

*. 칼사다 데 코토(Calzada del coto)-만시아 데 라스 뮬라스(Mansilla de las mulas) (32Km 8시 00분 출발- 18시 도착)                    

   <상세 일정 :  칼사다 데 코토(Calzada del coto 0.0km) →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까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5.5km) →엘 부르고 라네로(El Burgo Ranero 13.0km) → 렐리고스(Reliegos26.0km) → 만시아 데 라스 뮬라스(Mansilla de las mulas 32km) >


< by 개미(옥이) >


 기부제로 운영되는 알베르게의 기숙사 사감 같은 인상의 관리인이 이른 새벽부터 순례자들을 위한 아침 세팅을 정갈하게 해 놓은 덕분에 조촐한 조식을 나눕니다. 아침 식사비용도 알아서 적당히 기부해야 하는데, 이런 문화에 익숙지 않아 조금은 불편합니다.

< 광활하게 펼쳐진 오르막길 >

부활절 휴일이 시작되어서인지 아침의 칼사다 데 코토(Calzada del coto) 마을은 순례자들의 발소리와 스틱 소리만이 들릴 뿐 고요합니다. 하늘이 파랗고 공기는 엄청 청량합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광활하게 뻗은 평야라 낮은 평지를 걷고 있다는 착각이 들지만 길은 계속 조금씩 올라서고 있습니다. 두 시간여를 걷고 나서야 저 멀리 마을이 보입니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지만 마치 신기루처럼 마을이 나타났다가 없어졌습니다. 지친 발걸음을 빨리 쉬고 싶은 마음이 앞선 것이지요.

 드디어 칼사디야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Calzadilla de los Hernanillos) 마을이 보입니다. 역시 이 마을도 부활절 휴일로 썰렁한데, 자동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려 댑니다. 마치 우리나라 마을 두부 장수처럼요. 알고 보니 빵차였습니다. 순례자 고수답게 로컬 카페를 찾기 위해 성당 근처로 갔으나 역시 문이 닫혀 있고, 주인이 나와 우리가 지나쳐 온 카페를 알려 줍니다. 오던 길을 되돌아 카페를 찾아 들어가니,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프랑스 언니들이 와 있네요.. 어제 같이 잔 프랑스 젊은이도 있습니다. 다음 마을까지 지루한 칼사다 로마노가 계속되기 때문에 미리 요기를 해 두어야 한다고 프랑스 언니가 웃으며 말합니다.

 쾌청했던 하늘 저편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바람은 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아 그런대로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깁니다. 마을과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을 차가 오면 자리를 비켜주고, 미처 피하지 못하면 자동차가 비켜 갑니다. 먼저 출발한 프랑스 언니들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5시간 여동안 우리는 우주의 넓은 공간에 뚝 떨어진 작은 별처럼 넓디넓은 평원에 두 사람만 걷게 되는 생경한 경험을 합니다. 그 많던 순례자 친구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아군에서 두 갈래 길로 나누어지는데 우리는 순례자들이 잘 찾지 않는 구간(칼사다 데 코토-칼사디야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구간, 어디를 둘러봐도 끝이 없는 평원의 지평선만 보이는 구간 저 편으로 열차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지루함을 달래 줍니다. 아스팔트 길이 끝나고 지평선을 향해 끝없이 뻗어 있는 밀밭 사이를 걷습니다. 

< 간이 쉼터 >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로 바람이 검은 먹구름을 머리 위로 몰아옵니다. 비가 후드득 떨어지며 바람이 붑니다. 방금 지나온 쉼터로 다시 돌아가 비를 그으며 부활절의 기적을 말합니다. 하늘은 금세 맑아지고 햇살이 환하게 흰 구름 사이로 내리쪼입니다. 남편은 비를 소재로 한 노래를 같이 해 보자고 합니다. 힘이 들 때마다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하루 종일 비바람에 시달리며 대지와 바람과 구름과 해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힘들지 않은 척하는 남편에게 왠지 모르게 화가 납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줄곧 걸어갑니다.     


비바람에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하며 진흙바닥을 걸으며 순간적으로 후회감이 밀려옵니다. 이제 겨우 절반을 지났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내가 왜 이 길을 가는 걸까?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될 즈음에 렐리에고스(Reliegos)마을이 나옵니다. 포도주 저장고 풍경으로 이름난 이 마을도 역시 부활절 휴일을 즐기는지 거의 모든 곳이 닫혀 있습니다. 간신히 알베르게를 찾았으나, 다른 코스로 온 순례자들로 이미 꽉 찼습니다. 잠시 이곳에서 숨을 돌리고 할 수 없이 다시 길을 떠나야 합니다.


   종일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쉼 없는 길을 걸은 우리에게 5,6km는 고행입니다. 다행히 비는 그치고 그나마 길은 물이 빠져 진창이 아닌 것에 작은 감사를 하며, 만시아 데 라스 뮬라스(Mansilla de las mulas)에 도착합니다. 까미노 순례길 중 가장 많이 걸은 날입니다. 내일은 레온까지 18킬로 정도를 갑니다. 미리 6킬로 정도 저축을 한 셈이지요.

 오늘은 호스텔에서 묵습니다. 세탁도 하고 목욕도 좀 편하게 하고 싶어서지요. 힘들게 걸어온 몸에게 가끔씩은 보답을 해야 합니다. 저녁을 먹는데 옆 식탁에 영국 웨일즈와 이탈리아 어딘지에서 오셨다는 분들이 식사를 하며 알은체를 합니다. 우리는 영화 ‘시네마 천국’으로 천진난만하게 하나가 됩니다. 영화 주제가를 들으면서 말이죠. 역시 영화와 음악 이야기는 세계 공통 언어입니다. 내일 레온의 어디에선가 만날 것을 기약하며 작별을 합니다.     

목적지도 아닌 내일의 기착지 레온이 기대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게 어쩔 수 없이 도시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동안 무수히 걸어온 피레네 산맥 이남 메세타 지역의 밀밭에 싫증이 난 것일까요?.... 생각해 보니 오늘 너무 힘들게 걸었기 때문일 겁니다. 기차를 타고 간 J가 하루 더 머문다 했는데,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H와 다른 친구들도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하며 오늘 마무리를 합니다.




< by 베짱이(일이) >


  칼사다 데 코토(Calzada del coto)는 어둑한 골목길에 차갑게 내리던 비와 뜨거운 샤워의 대비만큼 마리나의 출현과 알베르게 관리인의 인상이 대조적이었다. 마리나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중세의 음습한 수도원에 유폐되었던 기억으로 남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하룻밤이었다. 

 알베르게 앞 광장 한편에 배낭과 스틱을 내려놓고 신발끈을 다시 맨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가을날처럼 파란 하늘이 비 온 뒤의 신선한 대기와 어울려 아침 기분을 상쾌하게 해 준다. 


  아침 기운이 영향을 주는 시간은 대개 처음 두 시간 정도인 것 같다. ‘시야(視野)’라는 단어의 개념을 어쩌다 생각하게 되는 한반도의 지형과는 전혀 다른 탁 트인 고원 지대를 시나브로 오르고 내리는 길을 걷다 보면 시간이 뒤로 흘러가는 느낌이 든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서쪽 갈리시아 지방에 있다. 긴 해 그림자가 짧아졌다 다시 길어 짐에 따라 시간을 감지한다. 마치 시간과 길동무가 되어 함께 걷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는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 잊고 공(空)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인데, 가끔은 이런 순간이 지난 뒤에 알아차리기도 한다. 명상(冥想)에서 깨어나는 것은 늘 어떤 변화 앞에서이다. 바람과 구름과 비가 연주하는 기후의 삼중주가 잠시 잠시 선(禪)에 빠져드는 나를 깨운다. 


인적도 없고 마을도 보이지 않는 끝도 없는 평원의 길을 걷다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멀리서 교회 첨탑과 회색 지붕들, 무채색과 원색의 가옥들이 언덕 아래로  보인다.  이미 마음은 그곳에다 미리 짐을 풀어놓지만 ‘시야가 탁 트인’ 이곳의 지형 특성상 그곳의 물리적 거리는 마음의 거리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칼사디야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Calzadilla de los Hernanillos)는 작은 마을이다. 골목길에 문을 연 카페에서 프랑스 누님들과 식사를 한다. 이제 이 분들과의 작별의 순간도 다가오고 있다. 이 분들은 프랑스 남부 도시 리옹(Lyon)에서 오신 분들인데 르퓌(Le Puy)에서 시작하는 프랑스 순례길을 걸어오신 것이다. 다양한 경로로 여러 번 이 길을 걸으신 베테랑들이시다. 이 번에는 레온(Leon)이 종착점이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눈빛만으로도 많은 소통이 되었던 분들이다. 남편들은 자전거 마니아여서 고교 동창인 자기 둘이 자주 같이 다닌다며 우리 둘을 매우 예뻐해 주신 분들이다.  

 아침 요기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 하염없이 걸어야 할 길 >

  하염없이 지평선을 바라보며 걷는 것은 생경한 체험이다. 물론 그동안 걸은 길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오늘 길은 유난히 우리 둘 주위의 공간이 마치 광대무변한 우주가 주는 경외감으로 다가온다. 수시로 달라지는 변덕스러운 날씨에 우비를 갈아입지 않고 구름 사이로 잠시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해와 마른바람에 젖은 몸을 말리며 걷다가 만난 쉼터에서 이제 은퇴를 하고 쉼을 즐기려는 우리 부부의 앞날을 이야기한다.

 

< 폐허가 된 포도주 저장고 >

  다시 진흙길을 걸으며 비바람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에 안갯속에 환상처럼 갑자기 나타난 렐리에고스(Reliegos)마을에서 우리는 오늘 일정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쉴 생각을 하니 얕은 구릉을 이용한 포도주와 음식 저장고가 마을 입구부터 주욱 늘어서 있는 모습이 이제 눈에 좀 들어온다. 숙소를 찾아보았으나 부활절 연휴라 그런지 거의 휴무다. 다시 지친다. 조금 더 골목을 걷다 발견한 알베르게에 G와 T부부가 이미 방을 배정받았고 리셉션과 홀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아, 그런데 방이 없다"라고 여주인이 말하며 좀 쉬며 비를 피해 가라고 한다. 

다른 마을까지는 거리도 멀고 날도 궂은데 어찌하랴?

 ‘내친김에 서울 간다.’는 느낌으로 우리는 다시 비바람 앞에 선다.


 마을을 나서자 곧 도로 옆 진흙탕 길이 주욱 이어진다. 다행히 비바람이 잦아들고 가로수도 있는 길이다.  쉬어 갈 수 있는 긴 의자들도 있다. 만시아 데 라스 뮬라스(Mansilla de las mulas)까지는 렐리에고스(Reliegos)에서 거의 6킬로 거리에 있는데, 아직 절반도 채 못 온 것 같다. 그런데 비바람이 그치니 지친 몸도 조금씩 회복되어 가는 듯한 이 생경한 느낌은 무엇인가? 아내도 그렇다고 한다.  렐리에고스(Reliegos)에서 잠깐 비를 피한 것과, 달리 방법 없어 만시아 데 라스 뮬라스(Mansilla de las mulas)라는 긴 이름의 마을까지 가야 하는 운명에 순응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마사토가 섞인 길이라  금세 물이 빠지고 흙이 말라서 걷기 좋아진 환경이 된 것이 큰 몫을 했으리라. 몸이 지쳤을 때는 작은 기후 환경의 변화에도 민감해지는 것이다.  


오늘 같은 날은 좀 편한 숙소에서 쉬어 가는 것이 먼 길을 가는 순례자의 지혜이다. 

이 길 위에서 혼자 걷는 이들 중 마음에 맞는 동행을 만나 줄곧 함께 걷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나이와 국적에 무관하게 말이다.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왔다고 자기들 소개를 하는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분들과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물론 부부는 아니다. 이 분들과 ‘쥬세페 토르나토레’와 ‘엔리오 모리코네’의 명작 <시네마 천국>을 소재로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를 유쾌하게 전환한다. 영국 남자분이 영화 ost를 자신의 휴대폰으로 들려준다. 두 분이 앞으로 남은 시간을 뜻깊게 잘 보내기를 기원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이 곳 사람들에게 부활절이 가지는 의미 정도는 안다. 내일 레온이라는 도시에 펼쳐질 부활절 축제를 기대하며 비바람과 진흙길 속을 고독과 고통 속에 걸었던 하루를 조용히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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