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13. 수)
*. 만시아 데 라스 뮬라스(Mansilla de las mulas)-레온(Leon) (18.8Km 8시 45분 출발- 14시 도착)
<상세 일정 : 만시아 데 라스 뮬라스(Mansilla de las mulas 0.0km) → 비야모로스 데 만시아스 → 뿌엔떼 데 비야렌떼( Puente de Villarente 6.0km)→ 아르까우에하(Arcahueja 10.5km) → 발데라푸엔떼(Valdelafuente 12.0km) → 뽀르띠요 언덕(Alto del Portill0 14.5km) → 뿌엔떼 가스뜨로(Puente Castro 16.0km) → 레온(leon 18.0km) >
마을 끝에 있는 에슬라(Rio Esla) 강위의 아치교를 올라서니 저 멀리 다시 평원이 펼쳐집니다. 물 흐르는 소리와 새소리가 요란하게 청량한 하늘에 울려 퍼지고 아침 기운에 고무되어 정감 있는 작은 도시를 벗어나 레온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쭉 걷습니다.
어제의 비바람은 시치미를 뚝 떼고 하늘 위에 미동도 않는 하얀 구름과 함께 얌전히 앉아 있습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만시아 데 라스 뮬라스(Mansilla de las mulas)로 들어올 때 로마 가도는 부상병과 패잔병들로 가득한 처참한 몰골의 로마 병사들을 연상시켰다면 신선한 이 아침의 길은 위풍당당하게 개선하는 그들을 연상시킵니다.
가다가 두 갈래 길이 나오면 거리가 조금 길더라도 무조건 우회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마을도 구경하고 우물에서 물도 길을 수 있으니까요.
로마 시대의 유적지가 남아 있는 비야모로스 데 만시아(Villamoros de Mansilla)의 골목을 들어서니 곧 샘물이 나옵니다. 로마처럼 이곳 스페인도 물 인심은 좋지요. 아직 덧창을 열지 않은 집들이 대부분이고 그 흔한 강아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골목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이들의 하루가 조용히 시작되고 있겠지요. 집안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주부들의 바쁜 손놀림이 느껴집니다. 늦잠을 자는 어린아이들도 있겠지요. 또 잠이 없는 노인들은 일어나 신문을 읽고 있겠고, 벌써 일어나 어디 일하러 나간 젊은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숲으로 향하는 길이 나오는데 길바닥에 무언가 꿈틀대는 것이 보입니다. 달팽이가 밤새 내린 찬 이슬에 젖은 몸을 말리고 있습니다. 혹시 순례자들의 발길에 밟힐까 싶어 살짝 들어 숲 속으로 옮겨 놓습니다. 길가의 이름 모를 풀들 위로 영롱한 이슬방울이 햇빛에 반사되고 있고, 추위에 움츠려 들었던 민들레 꽃잎도 오므렸던 꽃망울을 살짝 펼치려 움직이고 있습니다.
새벽이슬을 가르며 얼마 걷지 않았는데 뽀르마 강 위에 큰 아치형 다리가 놓여 있는 푸엔떼 비야렌떼(Puente Villarente) 마을이 나오고, 이른 아침부터 어린아이들이 잔디 축구장에서 뛰어놀고 있는 모습이 참 평화로워 보입니다. 역시 큰 도시 옆에 있는 위성도시에는 사람들과 자동차들로 시끌시끌합니다. 골동품 상점들도 많이 보이고, 무엇보다 큰 슈퍼마켓이 문을 열어 아침 장을 보는 주부들이 많이 보입니다.
오늘의 길은 레온(Leon)으로 향하는 큰 도로 옆으로 난 산책길을 따라 걷는 거라, 마치 서울에서 한강 길을 걷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들어간 아르까우에하(Arcahueja)마을의 작은 바에서는 라디오에서 BTS의 노래까지 흘러나와 이곳이 까미노 순례길이 아닌 서울의 어느 익숙한 장소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식사 후에 걷는 길은 공장 건물과 농작물 창고를 지나게 됩니다. 다소 지루할 수 있었는데 마침 만난 개리와 써리스 부부와 수다를 떨며 걸었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가볍게 레온(Leon)에 진입을 합니다. 이제 조금씩 익숙해지는 영어 듣기 덕분에 어제 렐리에고스(Reliegos)에서 있었던 벨기에 국왕 가족의 방문 사실과 부부의 산티아고 이후 일정 등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레온(Leon)은 레온주의 주도이며 주변 위성도시들이 포함된 인구가 380만 정도 되는 큰 도시입니다. 1세기경 로마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오래된 도시로 레온 왕국의 수도였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산티아고 순례길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곳입니다. 도시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고 있는데 반가운 얼굴이 들어옵니다. 발에 물집이 잡혀 며칠 쉬었다는 H가 들어옵니다. 궁금했던 차에 서로 붙들고 안부를 챙깁니다. 같이 은행에 가서 현금도 두둑이 준비하고, 레온 성당으로 갑니다.
레온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장미 문양 이상으로 정교하고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앙제단을 중심으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삼면을 둘러싸고 있고, 그것을 통해 햇빛에 반사되는 모습은 압권입니다. 들어가는 문 위쪽에 부조되어 있는 조각들이 여느 성당과는 다른 모양입니다. 성모 마리아를 중심에 두고 오른쪽에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형상을, 왼쪽에는 천국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세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들어가기 전부터 경건함과 엄숙함이 저절로 우러나게 합니다. 성당 밖으로 나오니 저녁인데도 대낮처럼 환한 햇살이 성당 파사드를 비쳐주고 있습니다. H가 “저렇게 멋진 성당 옆 의자에 누워 있는 노숙자도 부럽네요...”라고 말하며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 라면 등을 사기 위해 찾아간 중국인 마트에는 온갖 한국 음식이 즐비합니다. 가장 땡기는 맛, 결국 신라면을 사 가지고 와서 까루프에서 산 초밥을 곁들여 오랜만에 한국식 저녁을 먹습니다.
식사 후 레온의 특별한 부활절 전야제를 구경하기 위해 다시 성당으로 나갑니다. 조금 뒤쪽으로부터 둥둥 북소리와 악대 소리가 들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상징하는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습니다. 검은색 두건과 수도사복 등 중세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각각의 에피소드별로 제작된 형상을 둘러메고 행진을 하는데 참가자들의 규모가 엄청납니다. 그야말로 남녀노소 참가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베란다 문을 열고 환호하는 주민들과 관광객들로 진지하면서도 열띤 분위기가 계속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에서 부활하신 장면에서는 모두 박수로 환호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등장까지만 관람을 하고 숙소로 돌아옵니다. 알베르게 취침 시간을 의식해서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오랜만에 부활절 전날 깊어가는 레온의 밤을 즐기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일 길을 떠나야 하는 순례자이기에 아쉽지만 자제하기로 합니다. 레온은 매우 인상적인 까미노 순례길에서 만난 도시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합니다.
만시아 데 라스 뮬라스(Mansilla de las mulas)에서 맞는 아침은 비바람과 진흙탕길이었던 어제와는 달리 화창하게 갠 날이 될 것임을 예고하듯 바람 한 점 없이 맑고 청량하다. 우리는 적어도 이 길에서는 일기 예보에 연연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 길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걷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인생을 사는 방법과도 닮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로마 길도 걷기 좋게 말라 있다. 첫 번째 마을에 접어들면서큰 길 대신 골목으로 슬쩍 들어간다. 골목길은 사람들이 내는 소음과 냄새가 속살거린다. 출근과 등교로 분주한 모습 대신 집 안에서 부활절 휴일 아침의 여유를 즐기는 마을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을 떠올린다. 이런 날은 여행자들이 오히려 더 분주하다.
비야모로스 데 만시아(Villamoros de Mansilla) 마을에서는 우물가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서두르지 않고 골목 풍경에 빠져 천천히 걷는다.
다시 도로변의 길을 걷는다. 상가가 발달한 것으로 보아 대도시 레온으로 가까이 갈수록 마을들의 규모도 커지는 듯하다. 어쩐지 그리 낯설지 않은 도시길이다. 아침 기운을 받은 푸른 강물이 더 시원하게 흐르고 그 위로 멋진 아치가 인상적으로 걸려 있는 마을이 푸엔떼 비야렌떼(Puente Villarente) 마을이다.
그 다음 마을인 아르까우에하(Arcahueja)의 바(Bar)에서 요기를 하는데 스페인 라디오 방송에서 BTS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주인장에게 아는 척을 하며 익숙한 노래를 들으니 만감이 교차한다.
대도시 외곽길은 큰 도로 옆길로 이어진다. 하늘과 맞닿은 광활한 평원의 길을 걷는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대도시에서 살아온 세월이 길들여놓은 몸은 익숙한 도회의 풍경이 다소 반갑기도 하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은퇴 일 년 차 부부 G와 T 부부를 만나 함께 걸으며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G는 다리가 조금 불편한 부인과 산티아고 길을 완주한 후에 카나리아 제도와 지중해 크루즈를 즐기기로 약속했고 지금 실행 중이란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 특히 한국인 젊은이들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우리 부부의 은퇴 생활에 대해서도 궁금해한다. 트럼프에 관한 농담을 할 정도로 가까워진 부부는 서울에 사는 지인 부부를 떠올리게 한다. 나이가 들어 세상을 보는 눈이 무뎌진 걸까? 외국인들도 우리네들 사는 모습과 인생에 대한 자세 등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들 부부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레온에 도착한다.
미리 예약해 둔 시설 좋은 공립 알베르게는 도시의 초입에 있었다. 부활전 전야를 이곳 레온에서 즐기고 길 위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G와 T 부부와 헤어진다.
레온 성당의 내부는 바깥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차분하고 엄숙하다. 때마침 석양의 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여 실내를 신비롭게 물들인다. 스페인 3대 성당의 하나이며 레온을 대표하는 성당답게 그 규모 또한 놀랍다. 숙소로 가는 길에 저녁장을 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H와 라면과 초밥에 포도주를 마시며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나눈다. 발이 아파 며칠 쉬고 난 후 짐을 ‘동키’로 보내고 가벼운 짐만 가지고 때론 40킬로미터씩 강행군을 했단다. 생장에서 나폴레옹 루트를 무모하게 넘은 그녀가 아니던가? 살이 많이 빠지고 얼굴도 좋아 보였다.
저녁 식사 후 발길은 다시 레온 성당으로 향한다. 성당으로 가는 골목길에 가장행렬 복장을 한 사람들과 취주악대가 행진을 한다. 간이 무대를 설치한 차량들이 뒤를 잇는 행렬과 전야제 행사를 준비하는 분주한 모습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도시는 전야제 행사를 구경하거나 참여하려는 사람들로 다시 생명의 빛을 얻은 듯하다.
부활절 전야제는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를 축복하고 그의 숭고한 삶을 되새기는 기독교의 유일무이한 최대 행사이다. 이는 부활 현장을 확인한 마리아 막달레나와 또 다른 마리아가 되기 위해 그날의 아침이 올 때까지 ‘부활초’를 밝히고 온 밤을 지새우는 것이다. 예수 부활의 의미를 새기며 부활 전날 저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행사이다. 순례자 중에는 이곳에서 밤을 지새우고 하루를 더 묵은 뒤 다시 산티아고 길을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리는 온밤을 지새우지는 못하고 가장행렬을 두 시간 이상 지켜보다 알베르게의 통금시간을 지키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숙소로 향한다.
숙소 관리자가 담배를 피우다 우리 일행이 조금 늦은 것을 뭐라 하지 않고 문을 열어 준다. 오늘은 잠이 잘 오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