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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이와 일이 Aug 21. 2022

27화 ‘The way’의 아버지(25일 차)

(2022.4.18. 월)

*. 폰 세바 돈(Foncebadon)-폰페라다(Ponferrada)(27Km 8시 00분 출발- 18시 00분 도착)            

    < 상세 일정 : 폰세바돈(Foncebadon 0.0km) → 철십자가( Cruz de Ferro 3.5km) → 만하린(Manjarin 4.5km) → 엘 아세보(El Acebo 11.5km)  → 리에고 데 암브로스(Riego de Ambros 15km)  → 몰리나세까(Molinaseca 19.5km) → 깜뽀(Campo 23.5km) → 폰페라다(Ponferrada 27km)>


< by 개미(옥이)>


  산 위의 마을 폰세바돈(Foncebadon)을 지나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매우 걷기 편한 오솔길로 되어 있습니다. 저 아래로부터 떠오르는 해를 등 뒤로 두니 그림자가 길게 길 앞에서 우리를 인도합니다. 

< 철 십자가 >

 올라가는 길이긴 한데 둘러 둘러 가다 보니 어느새 영화 “The way”로 유명해진 철십자가(La Cruz de Ferro)상이 우뚝 솟아 있는 곳에 도착합니다. 이 언덕은 선사 시대의 제단이 있었고, 로마 시대에 길과 교차로의 신이자 죽음의 신인 메르쿠리우스를 모시는 사제들의 제단이 있었던 곳이라 합니다. 중세 시대 가우셀모 수도원장이 이곳에 첫 번째 십자가를 세우면서 중세의 순례자들은 십자가에 경배하며 고향에서 가져온 돌들을 가져다 놓았다고 합니다. 현대에 와서도 많은 순례자들이 각자가 염원하는 바를 적은 소원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기도 하고, 돌멩이에 글씨를 써서 십자가 주변에 쭉 쌓아 놓았습니다. 저도 아픈 동생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The way”는 어느 봄날 강화도 영화 카페에서 우연이 보게 된 영화인데 막연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생각을 더 간절하게 만들어 주었었지요. 하도 오래전 일이라 아버지가 이 십자가에서 한 구체적                                                                               행동은 잘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표지판에 1,504m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니 참 많이 올라온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저 아래 평원처럼 펼쳐진 산을 내려가는 일이 시작되네요... 생각보다 내려가는 길도 완만하게 되어 있어 쉽게 만하린(Manjarin)까지 4.2Km를 걷습니다. 서너 채의 집이 있었고, 독특하게 나무로 움막을 만들고 여러 나라의 국기가 걸려 있고 좀 독특한 집에 털보 아저씨가 종을 치며 쉬었다 가라 합니다. 요기를 할 요량으로 들어갔으나,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만 도네이션으로 줍니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계속 들어오라 하나 그냥 지나쳐 갑니다. 본인의 뜻대로 되지 않아서 인지 같이 사진을 찍자는 말에 ‘no’로 쌀쌀하게 말합니다. 그래도 잠시 쉰 것에 위로받으며 길을 떠납니다.


  아무리 완만한 길이라 해도 산의 높이가 있으니, 내려가는 길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정도 내려왔다 싶었는데, 다시 도로를 건너 오르막이 시작됩니다. 절리에서 떨어져 나온 돌들로 너덜 길이 형성되어 걷기가 힘듭니다. 고도가 높아서인지 키 큰 나무들이 아직 잎사귀를 피우지 못한 채 회색 이끼로 둘러싸인 모습이 그로테스크합니다. 저 멀리 서쪽으로 까마득하게 보이던 산들이 이제는 가까이 보이고, 산 위의 길이 구불구불 펼쳐진 모습도 잘 보이는 걸 보니 꽤 가까이 온 듯합니다. 길은 참 신비롭습니다. 저 길고 높은 길은 언제쯤 갈까? 하는 생각도 잠시, 걷다 보면 그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빈 속에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힘에 부쳐, 짜증도 나면서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에 조금 전까지 그리 멋지던 풍경도 지치게 합니다. 그러다 까미노 순례길에서 숨진 22살짜리 자전거 맨의 묘비명 앞에 섭니다. “The boat is safer anchored at the port but that’s not the aim of boats.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배는 항구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이 한마디로 22살 젊은이의 죽음의 의미와 우리가 왜 이 길을 걷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는 것 같습니다.


 엘 아세보 데 산 미구엘(El Acebo de San Miguel)에서 쉬기로 하고 내려오는데, 드디어 저만치 마을이 보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빨리 해보지만 자갈밭인지라 빨리 걸을 수 없습니다. 길은 오르막보다 내리막길에 조심해야 합니다. 마음도 급하고 쉽게 내려갈 수 있다는 생각에 방심하는 순간 발을 삐끗하는 경우가 있어 조심조심 내려가는데 헬기가 산 주변을 빙빙 돌다 저 멀리 날아갑니다. 아마도 비상 상황이 생겼나 봅니다. 별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조금 여유를 갖고 쉬어 가기로 합니다. 마침 길 옆에 나무도 우거지고 평평한 평지가 있어 쉬기 위해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금방 그곳을 나와야 했습니다. 까미노 순례길 중 마을이 나오지 않는 긴 구간을 걸을 때 가장 난감한 것이 화장실 문제입니다. 급하니 후미진 길가에서 처리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스페인 정부가 매년 늘어나는 까미노 순례자들을 위한 간이 화장실 설치를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 주인은 간 데 없고 벚꽃만 흐드러지네>

 마을은 지금까지 스페인에서 봐왔던 빨간 기와지붕이 아닌 너와 모양의 까만 돌지붕과 돌로 된 벽과 담장이 독특합니다. 오랜 시간을 걸어온 순례자들이 한 차례 쉬어갈 수밖에 없는 산 중턱에 있는 마을이어서 시끌벅쩍합니다. 알베르게도 몇 있는 것 같아 오히려 여기서 조용히 하루 머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인데 윗마을은 지친 순례자들이 쉬어 가지만 아랫마을은 거쳐만 가서 그런지 폐허가 된 집들도 많고, 세 놓으려고 써 붙인 집들도 있어 약간 을씨년스럽기도 합니다. 마을 끝자락에 다 허물어져 가는 빈 집에 주인 잃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산 아래로 내려올수록 자갈이 많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게 구불구불 길을 19km 정도 걸어 몰리나세카(Molinaseca) 마을에 도착해 점심을 먹습니다. 호텔 레스토랑인데 음식이 정갈하고 신선하여 좋습니다. 까미노 길을 걸으면서 가끔 식사를 제 때 할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있을 때를 대비하여 간식거리를 준비해야 합니다. 물론 어깨에 부담을 주지만 고른 영양분 공급이 긴 길을 걷게 하는 자양분이 되지요..


 이제 오늘 머물 곳까지 다시 7.6Km를 걸어야 합니다. 오늘은 산 길을 오랜 시간 걸었더니 몹시 지치고 피곤합니다. 산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이곳은 완전 여름 날씨입니다. 정원에 벚꽃이 피었다가 지고, 수선화, 개나리 등이 만개했습니다. 불과 열흘 전만 해도 밑동 부분만 남아 걱정했었던 포도나무 가지에 푸른 새싹이 쑥 올라와 있습니다. 저녁 5시가 넘었는데도 태양은 작열하고, 아스팔트로 이어진 길은 줄어들 기세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알베르게는 자원봉사자들이 일하는 곳입니다. 체크 인을 하고 동키로 보낸 짐을 찾으러 갔는데, 짐이 없어졌습니다. 어이할까요? 다른 곳이랑 바뀐 것 같다고 찾으러 갔는데, 소식이 없습니다. 진정한 순례자여야 했는데, 순례자 모양만 낸 우리를 신께서 벌주시는 걸까요?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붑니다. 비가 한 차례 퍼부을 모양입니다. 밤새 비가 내리고, 내일 걷는 길은 청명했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도 자원봉사자들이 한 시간 남짓 이곳저곳을 수소문하여 우리의 짐을 찾아가지고 왔습니다. 보통 봉투에 운송료를 넣어 배낭에 매달아 두는데, 봉투 속에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얼른 돈을 꺼내어 가져온 분께 지불하니 받지를 않습니다. 어찌나 미안한지 저도 계속 고집을 피웠더니, 알베르게의 도네이션 함에 넣으라 합니다. 순례자에게 배낭은 순례길 동안의 살림살이가 들어 있어 매우 중요한 물건인데, 무사히 찾을 수 있게 도와준 자원봉사자들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니 ‘괜찮다’하면서 웃어 줍니다. 


 오늘도 4인실에서 잠을 자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어제 프랑스 아저씨와 셋이 잤는데, 심한 코골이 때문에 잠을 설쳤거든요. 열두 번째 까미노 순례길을 걷고 있는 페트루스 같은 분으로 신격화했었는데, 밤새 코 고는 소리 때문에 그 신비스러움이 깨져 버렸습니다. 잠을 설쳐서 피곤하리라 생각했지만, 아침의 신선한 기운과 자연의 놀라운 치유력으로 몸이 가벼워짐을 느낍니다. 오늘도 두려움 없이 내일을 맞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by 베짱이 (일이) >


 해발고도가 높은 지역이라 기온이 낮아 추웠는데 어젯밤 알베르게는 따뜻했다. 다만 동침했던 파리지앵 E가 심하게 코를 골아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코를 골기 때문에 아침에는 서로 모르는 척 밝은 인사를 나눈다. 대기는 청량하고 아침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산정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얼마 걷지 않아 그 유명한 철 십자가(Cruz de Ferro)가 보인다. 이곳은 1,504미터 높이로 로마 시대에 사제들이 상업과 교역의 신 ‘메르쿠리우스(Mercurius)'를 모시는 제단이 있었던 곳이다. 순례자들이 길 위의 안녕과 인생길의 행복을 비는 장소로 종교적 권위와 신성함을 지닌 명소이다. 철 십자가의 뒤편에 쉴 공간이 널찍하게 마련되어 있다. 우리보다 먼저 길을 떠난 E가 떠오르는 해를 마주하고 앉아 명상을 하고 있다. 황금빛 햇살이 그의 연한 금발과 맑은 얼굴에 반사되어 눈부시다. 아내가 소원지를 적어 돌 더미에 묻는다. 

  능선을 따라 아래로 완만하게 길게 뻗은 길을 내려가며 구름을 아래에 두고 걷는 고산길의 매력에 푹 빠진다. 내리막길 아래로 보이는 마을이 만하린(Manjarin)이다. 마을 초입에 움막을 지어 놓고 지내는 ‘자연인’은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다. 혹시 요기 거리가 있을까 해서 들어가 보았으나 쓰디쓴 에스프레소 한 잔만 급히 마시고 돌아 나온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기막힌 선조들의 조언은 길을 가다 배가 고플 때면 언제나 떠오르는 명언이다. 그럴 때면 간간이 사탕이라도 입에 털어 넣으면 힘이 난다.   

 큰 산의 굽이 굽이를 내려가는 즐거움도 있다. 저 아래 보이는 산등성이와 골짜기의 풍경이 하얀 조각구름과 파란 하늘이 배경으로 가슴에 들어온다.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산굽이 하나를 돌아가다 만난 묘비명(墓碑銘)에 쓰인 글귀가 묘한 여운을 준다.  

   “The boat is safer anchored at the port but that’s not the aim of boats. 

‘우리가 왜 이 길을 걷는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현실의 삶’에 잊혀 버린 ‘도전과 모험의 꿈’을 새삼 일깨워 준 스물두 살 젊은이의 죽음 앞에 잠시 숙연해지며 다시 길을 간다.  


 엘 아세보 데 산 미구엘(El Acebo de San Miguel) 마을까지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돌길이라 속도를 내기 힘들다. 자칫 성급히 내려가다 발을 다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긴 여정이기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가까이 보이던 마을이 좀처럼 나타나 주질 않더니 까만 너와 지붕에 단단한 돌 벽돌과 담장이 특이한 산간 마을의 집들과 골목이 발아래에 보인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 골목에 지친 순례자들이 평화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마을에서 며칠 쉬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간단히 요기만 한다. 골목을 내려가니 한적한 아랫마을이 나온다. 문을 닫은 카페나 폐허가 된 집들이 많아 마음이 무겁다. 아마도 오래 지속되고 있는 감염병 때문이리라. 


 산길의 작은 시내도 만나고 자갈길을 걷기도 하다 골짜기가 넓고 벚꽃과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핀 봄의 정원에 도착한다. 몰리나세카(Molinaseca) 마을이다. 작은 물줄기가 모여 제법 큰 내를 이루고 냇가에 자리한 음식점에서 사람들이 모여 점심시간을 즐기고 있다. 경치만 즐기고 다리 건너 이어지는 골목길로 들어선다. 호텔과 음식점들이 즐비한데 그중에 한 곳을 골라 들어선다. 조용하고 깨끗한 식당이다. 젊은 여자 주인이 직접 서빙을 한다. 느긋하게 식사를 하며 좀 쉬어가기로 한다. 졸음이 쏟아져 왼쪽 팔로 턱을 괴고 잠깐 졸았나 보다. 


그늘이 있어 조금은 서늘하던 골목을 나오니 오후의 햇살이 강렬하다. 산 위에서의 선선한 날씨와는 사뭇 다르다. 큰 산을 하나 넘었더니 봄이 농익다 못해 어느새 여름의 문턱까지 기웃거리는 듯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228KM... 숫자에 무감각해졌었는데 내일이면 200KM를 돌파하게 된다는 생각에 다시 힘을 내 걷는다. 

더위에 지쳐 걷다가 깜뽀(Campo) 마을에서 다리를 쉬고 오늘의 최종 목적지를 향한다. 구름 한 점 없는 늦은 오후에 아스팔트 길을 걷는 것은 쉽지가 않다, 매일 목적지를 앞에 두고 누적된 피로 때문에 가장 힘이 드는 순간이 도착하기 한두 시간 전이다.   무더운 바람에는 흙먼지까지 묻어 있다. 


폰 페라다(Ponferrada)의 공립 알베르게를 찾아 구글 맵과 씨름을 한다. 한참 헤매다 찾은 곳은 넓은 주차장 바로 건너에 있는 큰 건물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가 봉사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침에 보낸 짐을 찾는데, 도착을 안 했단다. 말로만 듣던 일이 실제 일어난 것이다.  황당한 표정을 지으니 봉사자들이 근처 다른 곳에 잘못 가 있는 듯 하니 가서 찾아오겠다 한다. 다행히 한 시간여를 기다려 짐을 찾았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오늘 오후 내내 더위와 먼지와 싸우며 걸었는데 숙소에서 씻고 쉬는 시간이 짐 때문에 또 지체되고 있다. 

폰 페라다 공립 알베르게는 여러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규모는 상당히 큰 곳이었으나 일부 층만 개방하여 독립된 방이 없다. 스페인 현지인 부부와 우리 부부 넷이 침상이 넷 있는 작은 방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한다. 

어지러웠던 마음을 수습하고 몸도 씻고 나니 어둑어둑해졌다.  내일 짐을 보내는 장소로 지정된 큰길 건너의 로컬 식당에는 이 지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축구 경기를 보려고 모인 것 같았다. 아직 저녁 해가 남아 있어 사방의 커튼을 모두 내리고 빔을 쏘아 큰 화면으로 경기를 즐기는 것이다. 우리는 구석 자리에서 식사를 하며 오늘 일기를 정리한다. 이들이 저녁을 즐기는 평범한 모습을 보며 오늘 하루의 피로를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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