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17. 일)
*. 아스토르가(Astorga)-폰 세바 돈(Foncebadon) (25.5Km 8시 00분 출발- 16시 00분 도착)
< 상세 일정 : 아스토르가(Astorga12.0 km)→ 발데비에아스(Valdeviejas 2.0km) →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Murias de Rechivaldo 4.5km) → 산타 까딸리나 데 소모사(Santa Catalina de Somoza 8.5km) → 엘간소(El Ganso 13.0km) → 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 20.0km) → 폰세바돈(Foncebadon 25.5km) >
아스토르가(Astorga)의 공립 알베르게는 깨끗했고, 로마 성벽에 붙어 있어 분위기도 전망도 좋은 곳입니다. 시스템도 체계화되어 있어 많은 까미노 순례자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입니다. 알베르게의 체크아웃 시간은 오전 8시입니다. 서둘러 길을 떠납니다. 도시가 잠들어 있는 이른 아침은 매우 상쾌합니다. 적당히 게으르게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스페인 사람들의 여유가 늘 부럽습니다. 까미노 순례길이 가우디의 대주교관과 대성당을 지나게 되어 있습니다. 동이 터오는 햇살이 종탑 꼭대기로부터 내려와 서서히 성당 전체 건물을 감싸는 모습에 정신을 빼앗깁니다.
아스트로가(Astorga)에서 게으름을 피워 좀 더 속도를 내어 많이 걸어보려 합니다. 오늘은 과감하게 어깨의 짐을 줄이기 위해 동키 서비스를 신청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어깨의 짐을 줄이니 남편은 발가락이 아프다고 합니다. 그동안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걸을 때는 통증이 어깨로 몰리는 바람에 잘 몰랐을 것입니다.
앞에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자기 몸보다도 더 큰 배낭을 짊어지고 갑니다. 앞서가며 ‘올라’ 인사를 했더니 소프라노처럼 톤 높은 밝은 목소리로 응답합니다. 기분 좋은 만남입니다. 까미노 길에서는 나잇값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나라 나이로 남편은 예순네 살, 저는 예순한 살로 까미노 순례길을 떠나기 전에는 나이를 의식하며 괜히 주눅이 들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까미노 순례길에서는 모두가 친구가 됩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같은 알베르게에서 잠자고, 같이 씻고, 저녁이면 모여 맥주를 마시며 지나온 길에 관한 이야기며 세상 이야기를 함께 나눕니다. 순례길 오기 전 이런저런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던 우리는 새삼 이 길을 통해 많이 배웁니다. 앞으로 더 많은 도전을 해 볼 수 있는 용기를 배우고, 또 그것을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도시를 빠져나오니 도로 옆 오솔길이 나옵니다. 화살표가 애매하게 되어 있는데, 가볍게 차림 한 젊은 여성들 네 명이 앞질러 가길래 무조건 그 길로 쫓아갑니다. 길을 가다 아르헨티나 속옷 아저씨가 GPS를 켭니다. 잘못 간 것입니다. 다시 되돌아 애매한 화살표를 보니 바닥에 또렷하게 방향 표시가 있습니다. 미처 보지 못한 것이지요... 까미노 길은 워낙 친절하게 노란 화살표 표시가 되어 있는데, 까미노 고수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우리가 교만했던 것입니다. 다시 겸손하게 까미노 길 위에 섭니다.
내친김에 마을 세 개를 지나쳐 걸었더니 13km를 넘어서며 엘 간소(El Ganso)라는 마을에 도착합니다. 마침 카페가 보여 화장실이 급한 나머지 주문을 먼저 하고 들어갔습니다. 뒤늦게 온 남편도 똑같이 주문하고 화장실을 간 것입니다. 겹치기 주문이 되어 커피가 네 잔이 된 것이지요. 주인도 난감해하고, 우리도 어이없는 상황에 당황합니다. 지불을 하려고 했더니, 주인아주머니가 “괜찮다…. ”하며 물러줍니다. 와우! 어찌 또 이런 일이…. 미안해서 다른 메뉴를 시켜 먹습니다.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까미노 순례길입니다.
배낭 무게가 줄어서인지 걸음이 쑥쑥 걸립니다. 오늘 걷는 길은 산으로 점점 고도를 높여 가는 지역이라 앞에는 눈이 녹지 않은 큰 산도 보이고, 자갈과 돌이 유난히 많고, 그래서인지 지나는 마을마다 돌을 이용한 집들과 담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동안 평원처럼 펼쳐졌던 초원도 보이지 않고, 올리브 나무들이 무성한 산에 간혹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만이 보입니다. 까미노 초반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서 보았던 전경입니다.
어느새 20km를 걸어와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의 카페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습니다. 어린 꼬마 둘이 옆 테이블에 앉아 컴퓨터 게임을 하는 모습이 그림 같습니다. 시골이지만 어린아이들이 있고, 노인이 있고, 청년들이 있고 그래서 마을이 조화를 이루며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 카페를 나와 성당 근처로 오니 역시 시골 노인분들이 길가에 나와 햇볕을 쬐고 있습니다. 지나는 우리를 보고 활짝 웃으며 ‘부엔 까미노’ 인사를 먼저 건넵니다. 한바탕 회오리처럼 몰고 갔을 팬데믹을 겪고 난 후라 더욱 사람의 왕래가 그리웠을 것을 생각하니 반가움의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오는 순간입니다.
마을을 나와 아스팔트 도로를 가로지르니 투리엔소 계곡을 따라 엘 텔레노 산을 향해 계속해서 오르막길이 시작됩니다. 자갈이던 돌이 관악산 너덜 길처럼 주먹만 한 크기로 널브러져 있습니다. 걷기에 지칠 만하면 바람이 불어 그나마 더위를 식혀 줍니다. 산의 높이가 점점 가팔라지면서 숨이 찹니다. 너른 바위와 메마르고 푸석푸석한 흙이 대부분인 산에도 관목이 자라고 분홍색, 보라색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습니다. 역시 자연은 위대합니다. 뒤돌아보니 우리가 그동안 걸어온 마을과 평원이 저 아래 까마득하게 보입니다. 길은 공간 위에 있지만 길을 걷는 것은 시간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길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고, 뒤에 지나온 길은 과거입니다. 미래는 앞에 보이지만 알 수 없고, 결국 자주 뒤를 돌아보게 되는 이유는 뒤에 두고 온 길은 우리가 살아온 길이기 때문입니다.
너덜 길이 계속되는가 싶더니, 곧 걷기 좋은 흙길이 펼쳐지며 점점 산의 정상에 가까워집니다. 오늘 가려고 하는 폰세바돈(Foncebadon)은 고도 1,430m로 제법 높은 산입니다. 우리나라의 악산들처럼 높은 정상을 바로 치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둘레길처럼 서서히 올라가는 길이라 천천히 걷다 보면 산의 정상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어느새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폰세바돈(Foncebadon) 산 위의 마을에 도착합니다. 오래전부터 버려진 집으로 가득했던 산속 마을에 순례자들이 증가하며 마을이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마을 초입에 젊은 부부가 바비큐 연기를 피우며, 산 아래를 뷰 삼아 캠핑을 즐기고 있습니다. 산속에 있는 마을이라 한적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사람들로 붐비는 이곳에서 오늘의 긴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아스또르가(Astorga)의 멋진 알베르게를 뒤로 하고 벽화 거리를 지나 주교 궁을 향한다. 아침 해를 받아 고고하게 빛나는 주교 궁의 흰색 외관이 가우디의 영혼을 닮았다. 대성당에서 발길을 멈추고 바라본 성당 파사드에 해가 비치는 모습이 모네의 ‘루앙 대성당’의 연작 중 아침 장면을 연상케 한다.
오늘의 목적지는 폰세바돈(Fonsebadon)이다. 어감이 포세이돈과 닮은 이곳은 해발 고도가 높은 곳이어서 오랜만에 오르막길을 오를 결심을 해야 한다. 먼 길을 가다 보면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짐 하나를 보내고 나머지를 나누어지고 가기로 어제 결정을 했다. 이른 아침 짐을 폰세바돈의 숙소로 보냈기 때문에 정해진 숙소까지 가야 한다. 어깨가 가벼워진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 것이다. 덕분에 발걸음이 가볍다.
하는 생각을 하며 엘간소(Elganso)라는 마을에 이른다. 13킬로미터를 단숨에 왔다. 요기도 하고 숨도 고를 겸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휴식은 언제나 다음 여정을 위한 에너지바 같은 것이다.
다시 힘차게 길을 나선다. 피레네를 넘은 이후 오랜만에 큰 산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번갈아 오르내리며 겹겹이 파도처럼 펼쳐지는 능선과 봉우리들의 장관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걷는다. 가끔은 돌길에 굴곡이 심한 지대도 나오기 때문에 발아래를 조심해야 한다. 덕분에 눈높이의 관목들과 예쁘게 핀 야생화들과도 인사를 나눈다.
길은 시나브로 고도를 높이며 저 아래로 마을이 보인다.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다. 그리 크지 않은 산골 마을이다. 마을 초입의 카페에서 쉬면서 시장기를 달랜다. 내려가는 골목길에 쇠락한 상가와 산장들이 좀 을씨년스럽다. 작은 성당 앞 광장에서 볕을 쬐는 노인들의 따뜻한 표정에 마음이 좀 누그러지며 ‘부엔 까미노’와 엄지 척으로 인사를 드린다. 이 노인들에게서는 왠지 험한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존재감이 느껴진다.
골목길을 걸어 내려와 아스팔트 도로를 건너 계곡을 따라 엘 텔레노(El Teleno) 산을 오르는 길은 좀 거친 너덜길이어서 다리가 아프고 숨이 차다. 계속해서 오르막길을 오른다. 천천히 호흡을 조절하며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의지하고 발아래 펼쳐진 마을과 저지대의 풍경에 위로받으며 산의 정상을 향해 조금씩 거리를 줄인다.
하늘과 구름과 거대한 능선의 연봉들 아래로 다시 보이기 시작한 반가운 양 떼들이 연주하는 자연의 교향악에 취한다. 여러 차례 산굽이를 돌아 드니 마침내 1,430m 정상에 폰세바돈(Foncebadon)이 있다. 바람이 제법 세게 불지만 그리 차지는 않다.
해가 기우는 늦은 오후 산 정상의 풍경이 한가롭다. 주말을 이용해 야영을 하는 젊은이들과 가족들도 눈에 띄고 산장에 알록달록 빨래를 널어놓은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숙소를 찾아 짐을 확인하고 빨래를 해서 널고 저녁 먹을 곳을 수소문한다. 이곳에서 오랜만에 파리지앵 E를 만났다. 그와 같은 알베르게의 같은 방에서 동침을 하게 되었다. 침대 이층에 모로 누워 창 밖의 구름과 달이 바람에 실려 가는 듯한 모습을 본다. E가 심하게 코를 곤다. 폰세바돈의 밤이 깊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