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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이와 일이 Sep 02. 2022

29화 오르고 또 오르고.....(27일 차)

(2022.4.20. 수)

*.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라구나 데 까스티아(Laguna de Castilla)(28.5Km 8시 00분 출발- 16시 00분 도착)        

     < 상세 일정 :  비야프랑까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 0.0km) → 뻬레헤(Pereje5.0km) → 뜨라 바델로(Trabadello 10.5km) → 라 뽀르뗄라(La Portela 15.5km) → 암바스메스따스(Ambasmestas 17.5km) → 암바스까사스(Ambacasas 18.5km) → 베가 데 발까르세(Vega de Valcarce 18km)  → 루이뗄란(Ruitelan 20km)  → 라스 에레리아스(Las Herrerias 21km)  → 오스삐딸(Hospital 22.5km)  → 라파바(La Faba26 km)  → 라구나 데 까스티아 (Laguna de Castilla 28.5km) >


< by 개미(옥이) >

<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주인 부부의 젊은 시절>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 알베르게에서 모처럼 오믈렛을 만들어 커피와 아침 식사를 합니다. 멋지게 생긴 주인 부부가 이 알베르게를 자기들 손으로 직접 하나씩 일군 흔적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이 길을 걷다가 18년 전 까미노들을 위해 이 알베르게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추천할 만한 좋은 곳입니다.


  봄의 끝자락인데도 이 산속 마을은 여전히 찬 바람이 부는 겨울 날씨로 5월이나 되어야 봄이 올 것 같습니다. 함께 잠을 잔 순례자들이 속속 길을 떠나는데 오늘도 우리는 마지막으로 길을 나섭니다. 남편을 대신하여 배낭을 꾸리고, 길 떠날 채비를 하여 문밖에서 기다리는데, 여전히 신발 끈을 매고 있습니다. 참다못해 한마디 툭 내뱉고 맙니다. “오늘도 우리가 꼴찌네...”

  마을을 가로지르는 계곡이 꽤 깊습니다. 바람은 거세게 불고 있으나 해가 나기 시작하면서 추운 기운을 거두어 갑니다. 공기가 워낙 차고 깨끗하여 가슴속까지 시원합니다. 조금만 참을 걸... 하는 후회를 하면서 앞서가는 남편을 쫓아갑니다.


  늘 아침에 걷는 걸음은 속도가 납니다. 고가도로가 있고, 지방 국도가 죽 펼쳐진 큰 도로 옆 사잇길의 화살표를 따라 걷고 있습니다. 지저귀는 새소리에 간혹 지나는 차 소리가 묻힙니다. 조금 걷다 보니 페레헤(Pereje) 마을이 나옵니다. 마을에 인적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저 고양이들만 왔다 갔다 할 뿐 문 닫힌 집들과 고물이 된 오래된 차, 농기구가 뒹굴고 있어 몹시 을씨년스럽습니다. 여름이 오고, 순례자들이 본격적으로 오기 시작하면 이 마을도 활기를 찾을 수 있을까요?

< 다락방 창문에서 인사하는 인형 >

  태백이나 고한과 약간 비슷한 지형으로 그저 보이는 것은 산과 하늘, 줄지어 걸어가는 순례자들뿐입니다. 5km 정도 걸으니 뜨라바델로(Trabadello) 마을로 들어섭니다.  중세 시대에 부패한 귀족들이 순례자들에게 통행료를 걷고, 이를 거부하는 순례자들에게는 강도로 돌변하기도 했던 곳을 알폰소 6세와 템플 기사단이 점령하며 악습이 없어졌다고 전해지는 마을입니다. 그 옛날 무시무시했던 이야기와는 달리 조금 전 지난 마을과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공립 알베르게와 문을 연 카페도 여럿 보이고, 또 순례자들을 맞을 준비로 활기가 넘칩니다. 마을의 한가운데 아주 작은 3층짜리 집의 다락방 창문에 앙증맞은 인형이 놓여 있는데, 마치 커튼을 열고 길가는 순례자들에게 ‘올라’ 인사를 하는 듯합니다. 주인의 센스에 괜히 기분이 좋아지며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갑자기 비가 내립니다. 우비를 꺼내 입는데, 프랑스에서 온 페트루스 아저씨가 다가와 인사를 합니다. 2011년부터 1년에 한 번 혹은 두 번씩도 이 길을 왔다고 합니다. 카톨릭에 영향을 받긴 했지만 신자는 아니랍니다. 까미노 길을 걸으면 영성적이 되고 좋은 영감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같아서는 다시 오고 싶을까 하지만, 돌아가면 생각이 바뀔지는 모르겠습니다. 둘이 걷다가 동행을 만나면 걸음이 빨라집니다.


  해와 비가 번갈아 내리며 조화를 부리는 사이 베가 데 발까르세(Vega de Valcarce) 마을을 지납니다. 푸른 초원에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습니다. 어린 송아지가 어미 소의 젖을 물고 있는 모습과 집 화단에 화초를 심기 위해 삽으로 땅을 파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어우러져 목가적인 풍경입니다.


  길은 계속 아스팔트로 이어지며 완만하게 오르막을 오르고 있습니다. 라스 에레이라스(Las Herrerias) 표지판이 보이는 곳에 산장 같은 집 창가에서 누가 손짓을 합니다. 게리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 걸 보니 오늘 여기서 머무나 봅니다. 돌아보니 내쳐 20km를 걸어왔습니다. 살짝 마음이 흔들리는데, 동키로 짐을 보낸 우리는 라구나 데 까스티아(Lagua de Castilla)까지 가야 합니다. 어깨의 짐을 덜어 낸 대신, 자유의지를 구속당한 셈이지요... 라스 에레이라스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그 앞쪽에 산과 산을 연결한 천 길 낭떠러지 같은 고속도로가 아슬아슬하게 보입니다. 이제부터 저 높은 곳을 올라야 합니다. 우리나라 산처럼 나무가 우거진 모습은 아니나, 온통 붉은색의 능선이 햇빛에 반사되었다가 구름에 가렸다가 하며 윈도 창 같은 풍경입니다.


  올라가는 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숨이 턱에 차고 땀은 쏟아지는데, 또 바람이 불고 비가 뿌립니다. 까미노 후반 정도 되면 4Km 정도는 쉽게 가는 거리인데 해발 고도가 1,200m가 넘는 고지를 오르다 보니 힘에 부칩니다. 까미노 길의 마지막 고비라 생각하며 길을 오르고 또 오릅니다. 모퉁이를 돌면 또 다른 모퉁이가 보입니다. 매 순간 다음 길모퉁이에서는 다시 내리막길로 바뀌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머지않아 마을이 보이겠지라는 희망만을 품은 체 발걸음을 천천히 해봅니다. 오늘은 비바람 때문인지  길이 더 멀게 느껴집니다.


정말 힘든 날입니다. 오르막의 끝자락에 있는 흙길이 온통 비와 소똥으로 진창입니다. 비껴갈 길도 없고 등산화에 진흙이 덕지덕지 달라붙고, 비는 사정없이 쏟아집니다.  드디어 마을이 나옵니다. 오늘 묵게 될 알베르게를 발견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더운 기운이 훅 끼치고 많은 사람들이 벽난로 곁에 모여 있습니다. 독한 술을 한 잔 마시는 사람도 있고요. 우리가 들어 서자 스페인 부부와 함께 걷던 젊은 분들이 일어섭니다. 2.6km를 더 가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까지 간다 합니다. 부디 비바람 대신 햇살이 순례자들이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비추어 주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혹시 둘 중 하나라도 감기에 걸리지나 않았을지 걱정이 됩니다. 뜨거운 물 샤워를 하고 조금 일찍 쉬어야 할 듯합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알베르게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오는 계단으로 아이가(Aiga)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주 세찹니다. 1,200이 넘는 고지여서 그런가 봅니다. 내일 1,300 고지에 13km 이상  바람을 맞으며 걸어야 할 생각에 걱정이 앞섭니다.


  창밖으로 하루 종일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소 무리가 보이네요.... 배부르고 따뜻한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표정들이 환합니다. 우리가 걸어온 저 산 위로 저녁해가 붉게 물들어 옵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풀립니다. 라구나 데 까스티아(Lagua de Castilla)의 저녁이 저물어 갑니다.



< by 베짱이(일이) >


 오늘 예정한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까지 가는 일정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2.6km 전의 작은 마을 라구나 데 까스티야 (Laguna de Castilla)로 정했다.  영국 형제분들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1,350m 정상의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까지는 오르막의 힘든 길인 데다 일기도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짐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신중한 결정을 해야 한다. 


  어제 숙소는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산장 형태의 고급 알베르게인데, 이 부부들 역시 순례자들이었다. 그런데 순례길에 만난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 마을이 너무 마음에 들어 운명적으로 이곳에 머물게 되고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벌써 18년 전의 이야기이다. 까미노 길에서 숙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국적도 매우 다양하고 동기와 사연도 가지 각색이다. 길을 가다 길 위에 정착하여 길 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이제 그들의 일이 되는 것이다. 방랑과 정주의 순환은 자연스런 삶의 이치이다. 이 마을은 한국에서 방영되었던 TV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의 바로 그 마을이다. 산티아고 순례를 꿈꾸고 있었던 아내가 즐겨 보던 프로그램이었다. 체력도 떨어지고 날씨도 너무 추워 그 촬영 장소 찾기는 뒤로 미루고 길을 떠난다.    

< 폐허가 된 페레헤 마을 >

느지막이 깊은 협곡의 도로를 따라 걷다가 길을 건너고 고가 밑을 지나며 오늘 올라갈 산의 높이를 가늠해 본다. 산봉우리들 사이로 얼굴을 내민 하늘은 잔뜩 찌푸린 것이 어젯밤 초승달과 함께 잠깐 보여 주었던 그 신비스러운 모습이 아니다. 가끔씩 비가 섞인 찬 바람에 우비를 입고 걸으며 오늘의 고행(苦行)을 새삼 예감하지만, 수시로 변하는 날씨는 이른 봄 연초록의 숲과 계곡의 맑은 물소리와 새소리로 순례자들을 위로한다.

  지방도를 벗어나 샛길을 들어서 얼마간 걷는다.  폐허가 되어 버린 듯한 페레헤(Pereje) 마을은 아직 봄을 맞을 준비가 덜 된 을씨년스러운 모습이다.  깊은 산속 마을의 봄은 좀 더디게 찾아오게 마련인 게다.    


  한 시간을 더 걸으니 뜨라바델로(Trabadello) 마을이 나온다. 다행히 페레헤(Pereje) 마을과는 달리 마을에 온기가 있고 문을 연 알베르게와 카페도 길가에 늘어서 있어 울적했던 마음이 위안을 받는다. 

 갠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비가 내리니 조금 누그러졌던 마음이 다시 경직된다. 우비를 다시 꺼내 입다가 뒤따라오던 파리지앵 이브를 만나 함께 걷는다. 둘 만 걷던 길에 활기가 돈다. 그는 스페인의 순례길을 10년 전부터 매년 한 번 이상을 걷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길이 자신에게 묘한 영감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와 구름이 번갈아 조화를 부리는 짓궂은 날씨에 지칠 때쯤 베가 데 발까르세(Vega de Valcarce) 마을을 지난다. 초지에서 풀을 뜯는 소떼와 어미소의 젖을 빠는 송아지들이 평화로워 보인다.      

 

계곡 사이로 난 아스팔트 도로의 완만한 경사를 걷는다. 아담한 마을이 나오고  산장 같은 알베르게도 보인다. 알베르게 창문에서 누군가 우리를 손짓으로 부르는 것 같다. 자세히 보니 G 부부다. 오늘은 일찌감치 이곳에 자리를 잡았나 보다. 라스 에레리아스(Las Herrerias) 마을이다.  이 마을은 깊은 협곡의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우리 앞길에는 아직 올라야 할 높은 산이 가로막혀 있고 산과 산의 사이로 고가도로가 높이 이어져 있다. 저 높은  산 정상에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가 있고 우리는 그 아래 마을 라구나 데 까스티야(Lagua de Castilla)까지 가야 한다. 짐을 미리 보내게 되면 어깨는 가벼워지지만 정해진 숙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 하는 또 다른 짐이 생기는 것이다.

 아직도 7km 정도를 더 가야 한다. 길은 더 가팔라지고 비바람이 거세어진다. 해발고도가 높기 때문에 숨도 가빠진다. 땀과 빗물이 조화를 이루며 우비 안의 몸을 적신다. 흐려진 안경을 연신 닦기도 힘들어 나의 눈을 원망하며 오르고 또 오른다.  산길의 모퉁이 몇 굽이를 돌 때마다 마을이 보이기를 기대하지만 그 기대는 연이어 무너지고, 이제는 길마저 소똥과 흙으로 진창길이다. 그치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져 가는 비바람에 찬기운 마저 더해져 최악의 상황이다.  뒤따라 오는 아내를 돌아볼 기운도 없어 그냥 눈앞의 진창길만 내려다보며 하염없이 걷는다. 그러나 소똥의 전조는 마을이 가까이 왔다는 신호가 아닌가. 사막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는 곳이 바로 오아시스가 바라다 보이는 곳이라던데, 마지막 힘을 내 보자. 모퉁이를 돌자 마을이 보인다. 라구나 데 까스티야(Lagua de Castilla)다.


마침 숙소는 마을 초입에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 오아시스에 도착한 것이다. 이층 건물  아래층 문을 들어서자 음식 냄새와 술 냄새가 섞인 훈기가 우리를 맞이한다. 리셉션과 식당이 붙어 있는 다소 좁은 공간으로 먼저 와 쉬고 있던 순례자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준다.  어떤 젊은이들은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 정상까지 간다며 우리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이 혹독한 날씨에 2.6km를 더 올라가야 한다니...  가다가 날도 어두워질 텐데... 이럴 때는 이들의 수고와 무사를 비는 마음속 기도를 나도 모르는 사이 하게 된다. 


 뜨거운 물 샤워를 하니 몸이 좀 풀린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오르는 계단에서 맞는 바람이 차다.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로 떠난 순례자들이 고생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든다.  내일 우리가 갈 길인데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도한다.  창 밖을 보니 목초지에서 종일 풀을 뜯다가 줄지어 귀환하는 소떼들의 모습이 장관이다. 소떼들이 우리로 들어간 언덕 너머로 붉은색의 노을이 가득하다. 소똥 진창과 모진 비바람의 고행길은 벌써 잊히고 내일 걸어야 할 길도 그리 걱정이 되질 않는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것이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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