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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이와 일이 Sep 30. 2022

31화 까미노 파업하고 싶은 날(29일 차)

(2022.4.22. 금)

*. 뜨리아카스떼아(Triacastela)-사리아(Sarria)(24.5Km 8시 00분 출발- 14시 30분 도착)                 

 <  상세 일정 :   뜨리아까스떼아(Triacastela 0.0km) → 산 크리스또보 더 레알(San Cristovo do Real 3.5km) → 렌체(Renche 5.3km) → 라스뜨레스(Lastres 5.7km) → 프레이뚜세(Freituxe 7.0km) → 산 마리뇨 도 레알(San Marino de Real 8.0km) → 사모스(Samos 10.0km) → 포소스(Fo Xos 11.0km) → 떼이구인(Teiuin 12.0km) → 산따랴 데 빠스까이스(Santalla de Pascais 13.5km) → 고롤페(Gorolfe 14.5km) → 베이가 데 레이리스(Veia de Reiriz 16.5km) → 시빌(Sivil 18.0km) → 뻬로스(Perros 19.5km) → 사리아(Sarria 24.5km)>


< By 개미(옥이) >


 오늘은 울고 싶은 날입니다. 한 달이 가까워져서 그런 걸까요? 걷는 것을 파업하고 싶은 날입니다.

알베르게의 지붕으로 난 창에 밤새 비가 후드득 내립니다.  아침에는 그치고 맑았으면 합니다. 1층 침대에서 자는 아저씨의 코 고는 소리가 온 방에 울려 퍼집니다. 같이 자는 20여 명의 순례자들 모두 선잠을 자겠지요. 밤은 깊어가고 빗소리까지 들리나, 까무룩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피곤한 데다 와인을 반 병이나 마셨으니 저도 엄청 코를 골았을 것입니다. 까미노 초반 신경 쓰여 잠을 못 자던 일은 이미 오래전 기억이 되었습니다. 이 길 위에서 순례자들끼리 서로 이해를 하는 거지요. 그러고 보니 저도 순례자 다 되었습니다. 알베르게 도착하면 침낭부터 깔아 놓고, 최소한의 짐만 풀어 따뜻한 샤워를 합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른 순례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용히 짐을 챙겨 길을 떠납니다. 화장도 안 합니다. 옷 두 벌을 번갈아 가며 입습니다.


 아침이 되어도 여전히 비가 내립니다. 출발을 좀 늦추자는 남편을 설득하여 빗속을 걷습니다. 주위는 어둑하고 비옷을 뒤집어쓴 순례자들이 줄지어 걸어갑니다. 앞에 브라질 아줌마들의 우비 입은 모습이 스머프처럼 보이는데, 빗소리와 발소리 리듬에 맞춰 노래를 합니다. 도로 옆길에 깊은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화음을 맞추듯 청아하게 들려 더욱 신이 납니다. 비를 맞은 나무들과 풀들의 색이 선명하고, 공기는 청량하고, 새들은 더욱 요란하게 지저귑니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삐까메예 산의 울창한 숲길을 걸어 산 끄리스또보 도 레알(San Cristovo do Real)에 도착합니다. 마을을 지나는데 길가에서 예닐곱 마리의 고양이들이 머리를 한 곳에 모으고 아침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방해될까 싶어 잠시 멈춰 섭니다.

 < 이 길로 가야 하는데..... >


 비도 그치고 해가 들기 시작합니다. 강변의 숲길과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작은 시골마을 여러 개를 지나갑니다. 로우사라 계곡이 나오고 그 옆으로 오솔길이 이어집니다. 길 끝에 오래된 돌담이 쌓여 있는 골목을 지나니 오우떼이로 이 폰따오 성당이 나옵니다. 성당을 지나쳐 사모스(Samos) 마을 입구로 들어가는데 금슬 좋아 보이는 노부부가 산책을 나오셨나 봅니다. 인자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데, 때마침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따뜻하고 품 넓은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고갯마루를 넘어서니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는 사모스 수도원이 웅장하고 멋진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모스 수도원은 수사들이 부르는 환상적인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을 수 있는 곳입니다. 또한 수도원에서 만드는 소화를 돕는 술과 과자인 팍스(Pax)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먼 훗날 까미노 순례길을 다시 걷게 된다면 이 수도원에서 하룻밤 묵어 가고 싶은 마음을 접어두고, 맑은 오리비오강 상류의 다리를 건너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 다시 길을 갑니다.


  마을을 벗어나 지방 국도가 오른편으로 쭉 이어지고 왼편에는 비 온 뒤 불어난 모양인지 수량이 많아진 강물이 시원하게 흘러갑니다. 오른쪽으로 길을 건너 숲 속 오솔길을 따라 계속 걷습니다. 평탄한 길이 계속되다 드디어 오르막이 시작됩니다. 오랜만에 많이 올라왔습니다. 역시 올라오니 탁 트인 전망이 좋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를 쓰고 오르려 하는가 봅니다. 권력과 부와 명예가 있는 자리를 얻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나 우리처럼 걷는 사람들은 그저 언덕이 있어 오를 뿐입니다. 올라가 보니 전망이 좋아 잠시 즐기고 다른 이들을 위해 다시 길을 내려갑니다.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서면서 길을 안내하는 돌 표지판이 매우 촘촘히 세워져 있는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500m를 기준으로 세웠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순례자들이 혼동하기 쉬운 갈림길이나 건널목 등에 악천후에도 잘 볼 수 있도록 방향 표시를 해 둔 것입니다. 마치 등대처럼 말이지요. 순례자들을 위한 갈리시아 지방의 배려지요. 한편 목표 지점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아껴 가며 걸으라는 속 뜻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 봅니다.

< 촘촘히 세워진 표지석덕분으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어요... >

 고개를 넘고 굽이를 돌 때마다 우사가 있는 작은 마을들을 지나게 되는데, 어김없이 소의 분비물과 진흙이 섞인 구간을 걷기도 하고, 습한 바람에 묻어 있는 진한 배설물 내음을 맡으며 가야 합니다. 이 또한 진정한 순례길의 소소한 일상 중 하나겠지요. 까미노 순례길이 늘 환상적이고 영적 신비로움을 주는 아름다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냄새에 취해 머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플 때쯤이면 목적지에 가까이 온 것입니다. 드디어 저 앞에 사리아(Sarria)가 보입니다. 생각보다 큰 도시입니다. 숙소는 도심을 통과하여 외곽에 있습니다.


 그런데 또 동키 서비스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저께 아침 도시 간 요금인 5유로가 없어 10유로 지폐를 봉투 속에 넣었는데, 어제 뜨리아까스떼야 알베르게에서 확인하니 잔돈이 없습니다. 봉사자가 배달 회사에 전화하더니 내일은 빈 봉투에 주소만 적으라 해서 그리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리아 숙소에서 배낭을 찾으니 없습니다. 확인해 보니 뜨리아까스떼야의 알베르게에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사리아 숙소 주인과 번역기로 어렵게 의사소통을 했으나 지난한 과정이 이어집니다.


 이런 날은 순례길의 영감도 떠오르지 않고, 걷는 것도 파업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115km를 남겨 두고 제가 매너리즘에 빠진 걸까요? 그러나 순례길에서는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 결국 해결되지요. 사리아 숙소 주인아주머니가 직접 가방을 찾아다 주었습니다. 내일은 요금을 내지 말고 빈 봉투에 주소만 잘 써넣으라 합니다. 어제와 같은 상황이라 좀 불안합니다. 그렇다고 5유로를 봉투에 넣어야 할까요? 그럴 필요는 없겠지요.

  여기 사리아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거점 도시이고, 막달레나 수도원과 대성당 등의 볼거리가 많다고 합니다. 이제 가방도 찾았고 답답한 마음도 풀렸으니 이곳 분위기를 느끼러 나가 보아야겠습니다. 부엔 까미노!!!!!     



< By 베짱이(일이)>


  언제 들었는지 모르는 잠결에 전화 알람 소리가 들린다. 사위는 어두운데, 연이어 울리는 소리가 왠지 아내의 것일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든다.  어서 아내가 사태를 수습해 주기를 바라며 마음 졸이는데 한 두 차례 더 울리더니 소리가 멈춘다. 진땀이 다 난다. 이래 저래 잠을 더 자기는 글렀다.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낭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어둠이 걷히지 않은 거리 야외등 아래로 내리는 하얀 빗줄기는 제법 굵직하다.  오늘 길이 예사롭지 않을 것임을 암시해주는 것 같아 조금 불안하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어떤 움직임이 포착된다. 누군가 문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어제 만난 한국 여학생이 우의를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두 손에 스틱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잘 못 잤다고 하며 아내의 전화 알람을 가방에서 찾아내 대신 꺼 주었다고 한다.

맙소사! 대신 사과하니 괜찮다고는 하는데 영 속이 편치 않다. 부주의한 아내가 원망스럽다. 20명의 순례자들에게 폐를 끼친 것이다. 평소에도 아내의 알람이 자주 문제를 일으킨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지만 조심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어야겠다.


 모처럼 일찍 길 떠날 채비를 해 두고 아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비를 긋고 가려니 언제 그칠지도 모르겠고 빗속을 나서자니 선뜻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아내가 일어나 채비를 하며 길을 재촉한다. 비가 내리고 있어 평소보다 더 어둑하다. 빗줄기가 가늘어지며 조금씩 날도 밝아 온다.

< 노래하며 걷고 있는 브라질 아주머니들과 함께....>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가니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섞여 아름다운 화음을 내고 있다. 브라질에서 온 젊은 아주머니들이다. 올망졸망 걷는 모습이 마치 스머프들 같다. 신선한 아침 공기에 자연과 인간이 연주하는 대합창이 덤으로 주어지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빗줄기가 점점 더 가늘어지고 햇살이 비친다.


 오늘의 목적지 사리아(Saria)는 산티아고의 성지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갈리시아 지방의 큰 도시이다.  사리아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닷새 정도의 거리이다. 이제 마무리 단계에 이른 것이다.  

오늘 사리아까지는 23km 정도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다,  막바지에 이르니 어쩐지 힘도 좀 난다. 걷는 것도 익숙해지고 몸도 마음도 많이 단련된 탓이리라.


비도 멎고 화창한 날씨에 눈이 부시다.  폭이 넓어지고 수량이 많아진 시내의 계곡과 어우러진 도로를 걷다가 작은 공원도 만나고 다시 숲 속길로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여도 지루하거나 힘이 들지 않는다. 대자연이 주는 위로와 격려 덕이다.


 어느덧 고풍스러운 하얀 건물들이 여러 동 내려다 보이는 고갯마루에 이른다. 내려가면서 점점 가까이 다가서는 이 건물들이 매우 신비스럽고 아름다워 순간 이름 모를 감동이 밀려든다. 압도적으로 규모도 크다. 사모스(Samos) 수도원이다. 수도원 정원과 주변의 강과 멋진 아치교가 조화를 이루며 고요하게 운치를 뽐낸다. 제법 많이 걸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조금이라도 쉬어 두어야 한다.  수도원의 정경이 보이는 카페에 자리를 잡는다. 마을의 노인들 몇몇이 낯선 이들의 방문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본다. 간단히 커피와 빵 한 조각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 사모스 수도원 >

마을을 벗어나며 이어지는 시원한 물줄기가 오리비오 강이다. 비가 온 탓인지 물살이 빠르다. 강 옆으로 지방 국도가 죽 뻗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숲 속 오솔길로 접어든다. 이제 산길을 오르게 되나 보다. 조금 높이 오르니 조금 더 전망이 좋다. 앞이 탁 트인 전망대 아래로 펼쳐지는 푸른 초원과 구릉들이 이루는 부드러운 곡선 너머의 하늘 빛깔이 유난히 곱다.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서면서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매우 촘촘히 세워져 있다.  성지를 보유(?)한 지방 정부에서 순례자들과 방문객들을 위해 지나친 배려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이 길에 쏟는 정성을 느낄 수 있다. 소가 지나가며 배설한 흔적들도 수시로 청소차가 수거하고 물로 거리를 깨끗하게 청소한다.      

   여전히 목적지가 가까워지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피로감이 물려 온다. 지친 느낌이 드는 걸 보면 이제 곧 오늘의 목적지가 멀지 않은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에 실핏줄처럼 뻗어 있는 순례길에서 사리아(Sarria)는 여러 길들이 만나는 교차로이다. 저 멀리 앞에 보이는 도시가 사리아다. 숙소를 찾아 도심을 통과하는데 도시가 제법 규모가 커 보인다. 목전에 숙소를 두고 맴돌다 전화로 도움을 받아 드디어 입성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또 짐 배달 사고가 난 것이다. 이번에는 아예 뜨리아카스떼야에 짐이 머물러 있었던 것. 뜨리아카스떼야의 봉사자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한다는 말만 믿고  빈봉투로 보낸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뜨리아카스떼야의 숙소에 전화를 했더니 어제 봉사자에게는 연락이 되질 않는다. 사리아 숙소의 주인과 지난 이야기를 공유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국  자동차로 먼 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숙소 주인이 다녀오겠다 한다. 숙박비에 10유로 추가하기로 하고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러나 의사불통의 책임이 내게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질 않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 짐을 찾았다. 주인은 문제를 해결하여 성취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기왕에 5유로 때문에 빚어진 문제이니 자신의 수고비를 5유로만 받겠단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서도 기분이 풀리질 않는다. 아내가 내 기분을 이해하고 밖에 나가 기분 풀자고 한다.

  오늘은 포도주에 취하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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