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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이와 일이 Oct 13. 2022

33화 순례 초심으로(31일 차)

(2022.4.24. 일)

*. 뽀르또마린(Portomarin)-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25.0Km 8시 30분 출발- 16시 00분 도착)                    

< 상세 일정 : 뽀르또마린(Portomarin 0.0km) → 또시보(Toxibo 5.0km) → 곤사르(Gonzar 8.5km) →까스뜨로마이오르(Castromaior 9.5km) → 오스삐딸 다 끄루즈(Hospital da Cruz 12.0km) → 벤따스 데 나론(Vendas de Naron 13.0km) → 리곤데(Ligonde 16.5km)→아이레세(Airexe 17.5km) → 뽀르또스(Portos 20.0km) → 레스떼도(Lestedo 20.5km) →오스 바로스(Os Valos 22.0km) → 오 로라시로(O Rosario 23.5km) →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 25.0km) >


< By 개미(옥이) >


 뽀르또마린((Portomarin)은 1960년 댐의 건설로 수몰되어 언덕 위에 재건된 마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도시 풍경은 흰색의 벽에 검은색 기와의 주택가와 세련된 상점가와 카페 골목이 초록 잔디의 공원과 짙푸른 강물을 배경 삼은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고딕 양식이 가미된 듯 앞 뒷면에 장미 창의 장식을 볼 수 있습니다. 주택가 골목은 깨끗하고 베란다의 화초들을 각자의 분위기에 맞게 장식해 놓은 모습이 아침 기운을 받아 신선합니다. 이른 아침인데도 사리아(Saria) 다음 도시인 뽀르또마린(Portomarin)은 관광버스를 이용하여 순례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 짐을 버스에 싣느라 분주한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로 거리에 활기가 넘쳐, 이전의 순례길 아침과는 사뭇 다른 풍경입니다. 


이른 아침 문을 연 카페들도 많습니다.  알베르게와 바를 겸하고 있는 예쁜 카페에 앉아 우아한 주인아주머니가 해 주는 카페 콘레체를 마시며 떠나기 전 여유를 가집니다. 따뜻한 기운이 몸속으로 흐르자 몸이 가뿐해집니다. 뽀르또마린(Portomarin)의 옛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사진들이 벽면에 걸려 있고, 강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입니다.


 카페 문을 나서는데 독일 친구들이 ‘안녕’하고 한국말로 인사를 하며 저쪽 골목에서 걸어오고 있습니다. 어제 가르쳐 주었는데 기억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독일에서 꽤 큰 회사 CEO인 그가 ‘We walk, eat, sleep, everyday!’이라며 까미노 순례길을 즐기는 매력 넘치는 친구입니다. 기분 좋게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까미노 순례길의 일상입니다.


 도시를 내려와 미뇨강 다리를 건너서 다시 산길로 올라갑니다. 소나무와 금잔화가 아름다운 산봉우리들이 펼쳐지고, 길 위에는 까미노 순례자들의 행렬이 앞으로, 뒤로 쭉 이어집니다. 친구들끼리, 엄마와 딸이, 또는 온 가족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소리가 순례길을 가득 채웁니다. 우리처럼 생장부터 시작을 했든, 순례길 페트루스 이브처럼 아멜리아에서 시작을 했든, 랄프처럼 레온에서 시작했든, 또는 사리아에서 시작했든 출발점은 달라도 향하는 곳은 다 같습니다. 자전거에 짐을 가득 싣고 언덕길을 오르는 라이더들도 있고, 사정과 형편에 따라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플로라와 알렌 두 아르헨티나 청년들은 연인 사이입니다. 아스토르가(Astroga)에서 부터 만났는데, 수줍음이 많아서인지 길에서 만날 때마다 미소만 짓더니 오늘은 적극적으로 말을 붙여 옵니다. 플로라는 영화를 전공한 친구로 우리나라 봉준호, 김기덕, 홍상수 감독을 알고 영화도 많이 봤고, 송강호 배우도 아는 등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그의 남자 친구인 알렌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인데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이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를 하며 한국의 상황에 대해 묻습니다. 또 한국인들의 종교 분포, 최저 임금이며 계층 간 격차, 중산층 수준의 직업을 가진 사람의 평균 연봉과 음식값과 숙박비 등 물가 등에 관련된 질문을 합니다.  답하기도 쉽지 않은 문제들이 있어 진땀을 흘리는데, 눈치를 챘는지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 간다 하여 간신히 어려움에서 벗어납니다. 덕분에 힘든지도 모른 채 걸었지요.


 도로 옆길을 따라 걷다 다시 한산한 산속 오솔길의 오르막을 오르는데 약간 숨이 찹니다. 언덕에 올라서니 철기시대 유적지인 ‘카스토르 데 카스트로마이오르’가 나옵니다. 돌로 된 집터와 성터의 경계로 보아 그 시대 꽤 컸던 마을로 짐작되는 유적지입니다. 구릉을 내려와 다시 숲 속 오솔길의 얕은 오르막을 오르니 카페가 보입니다. 잠시 쉬었다 사거리를 지나 숲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있습니다.


 택시와 자가용들의 통행이 빈번한 길을 걸어 벤타스 데 나론(ventas de Naron)에 도착합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큰 레스토랑이 있고, 그 옆에 아주 작은 성당이 있어 들어갑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작은 예배당인데, 그 지방의 옛 영주였던 인물의 초상화와 막달레나 마리아의 조각상으로 유명한가 봅니다. 아주 작은 성당에는 의자도 없고, 앞이 안 보이는 봉사자가 스탬프를 찍어 주고 있어 큰 레스토랑과 대비되어 묘한 감정이 들게 합니다.

< 정상이라 할 수 없는 리곤데 정상을 향하여 >

 마을을 나와 다시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니 리곤데 산맥의 정상이 나옵니다. 산의 정상다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바람이 심하게 불어 정상임을 알게 합니다.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편안하게 걷습니다. 유독 나이 드신 노인분들이 많이 보이는 것을 보면, 그만큼 걷기가 쉽다는 것이겠지요.

 리곤데 마을에는 갈리시아 지방에서 가장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라메이로스 꾸루세이로(Cruceiro de Lameiros) 십자가상이 있습니다. 십자가상에는 한편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망치, 못, 가시관, 해골, 십자가가 조각되어 있고 반대편에는 팔에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17세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조각된 모습이 많이 훼손되어 자세히 보아야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올려놓은 쪽지와 돌들이 주변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까미노 순례길을 끝내야 하는 아쉬움 등을 적은 것이겠지요.....


 갈리시아의 친절한 표지판이 70km로 나오면서 뽀르또스(portos) 마을이 나옵니다. 점점 줄어드는 숫자를 보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멀지 않았음을 자꾸 인식하게 됩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어떤 감정이 들 지 남편과 이런저런 상상을 해봅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빨간 기와지붕의 집들이 보이고 알베르게를 겸한 카페가 나옵니다. 한동안 걸어온 많은 순례자들이 쉬고 있습니다. 우리는 좀 더 가보기로 합니다. 길 바로 옆에 돌로 된 종탑은 낡았으나 빨간 기와로 새로 단장한 성당 묘지가 보입니다. 앞에 너른 잔디밭이 있어 늦은 점심 요기를 합니다. 이 여유 있는 풀밭 위의 식사도 곧 끝나겠지요.


 항상 목적지가 가까워 올수록 힘들고 지쳐오는데 오늘은 더 멀리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컨디션입니다. 길은 다시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며 로사리오 언덕을 오르게 합니다. 까미노 순례길이 곧 끝나간다는 생각으로 아끼며 천천히 걸었는데도 오늘의 목적지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에 도착합니다. 


 도시의 입구를 들어서는데 노천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던 앞서 도착한 순례자들이 우리를 보고 격려의 박수를 칩니다. 

남편에게 한마디 합니다. “까불고들 있어. 700km를 걸어온 우리에게 초보가....” 웃자고 한 말이었지만 건네 놓고 이내 후회했습니다. 농담이었지만 내 마음에 “나는 너네들보다 많이 걸었어.”라는 교만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리아(Saria)부터 사람들이 많아지고 숙소며 식당이며 가는 곳마다 불편함이 생긴 것에 툴툴 불만을 내뱉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머리를 때립니다. 


은퇴 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자고 결심할 때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라는 물음이 다시 떠오릅니다. 생장에서 가졌던 마음, 하루하루 그 많은 시간을 걸으며 고민하고, 다듬고, 비우는 과정의 연속에서 들었던 생각들의 퍼즐이 순식간에 맞춰지며 다시 깨달음을 줍니다. 그리고 결심합니다. 처음 가졌던 마음, 그 설렘과 기대감, 그리고 두려운 마음들을 다시 꺼내어 순례 초보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겠다고요......


          



< By 베짱이(일이) >


뽀르또마린((Portomarin) 알베르게는 춥고 썰렁했다. 숙박객은 우리와 미국인 처녀 하나 외에는 볼 수가 없었다. 이 미국인 처녀는 우리의 저녁 식사 내내 식당에서 전화 통화를 한다.   자기 짐이 배달되지 않았는데 그 책임의 소재를 따지는 것 같았다. 반복되며 길어지는 통화가 끝나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이 흐른다. 다행히 해결이 되었는지 밝은 얼굴이다. 그제야 알베르게가 춥다는 것과 ‘엠마 왓슨’을 닮았다는 농을 하자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훈훈하게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잠자리로 향한다.   

< 뽀르또마린의 옛 모습 >

뽀르또마린((Portomarin)은 우리나라의 충주호처럼 1960년대에 댐의 건설로 수몰되었던 마을이다. 그 후 언덕 위에 이렇게 아름답게 재건된 것은 새로운 각오로 주민들이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려고 나선 의지와 지역 정부의 지원 정책 덕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아침을 먹기 위해 들어간 강 위의 카페 한쪽 벽에 건설 전과 후의 과정이 흑백 사진으로 잘 전시되어 있었다. 변천의 역사를 보니 도시 풍경이 더욱 멋지게 다가온다. 흰색과 검은색의 조화가 잘 어우러지는 골목의 건물들 배치도 그렇고, 마을 중앙에 위치한 성당의 장미 창도 아침 햇살을 받아 찬연히 빛난다.  이른 아침의 거리에는 단체 관광객들을 태우고 온 것으로 보이는 대형 버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사리아(Saria)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풍경이다. 강을 바라보며 먹는 따뜻한 커피와 샌드위치가 한결 기분을 좋게 한다.       


 선한 표정의 독일 젊은이 R이 한국어로 ‘안녕’이라고 인사를 한다. 어제인가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들은 우리의 이름을 알지 못한 낭패를 극복하기 위한 모습인 것 같아 웃음이 나온다. 동부 독일 출신인 이들은 큰 식료품 공장의 책임자들이라 하는데 휴가를 내고 동료들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독일은 통일 후 삼십 년이 지나 동부와 서부의 차이가 많이 없어졌고 그냥 독일로 되었다 한다. 우리나라의 사정을 생각하니 울적하고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나온다. 우리는 언제 너희 나라처럼 하나로 살 수 있게 될까? 속으로 질문을 던진다. 한때 남과 북이 교류하던 2000년대 초반 백두산도 가고 금강산에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백두대간의 북쪽 구간을 걸어 백두산까지 가려했던 꿈이 이제는 백일몽이 되어 버린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다리를 건너며 내내 이런 상념에 잠기었었는데 곧 산길을 올라서게 된다. 앞 뒤로 길을 가는 순례자들이 이제는 더 다양해져 청소년들과 귀여운 어린아이들이 부모 손을 잡고 걷는 모습도 보인다. 우리가 어디에서 출발을 했던 지금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서 밤하늘의 별을 함께 볼 수 있게 되겠지. 서울에서 평양까지, 한라에서 백두까지 길이 열린다면 세계의 남녀노소가 참여하는 유례없는 긴 행렬을 볼 수 있으련만... 지구상 유일 분단국에 금단의 길이 다시 열린다면 산티아고 길 이상으로 세계가 주목하지 않겠는가? 이런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좀 풀린다.


이 길 위에서 만난 인연도 다양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을 다 합쳐도 이렇게 인종별, 지역별 각계각층의 남녀노소들을 다양하게 많이 만나 본 적은 없었다. 짧은 눈인사에서 시작하여 개인사나 주제별 관심사를 제법 긴 시간 나눈 사람들까지 만남은 다양하게 이어진다. 이 길이 끝나도 이어질 인연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남 인연 중에는 연인 사이인 아르헨티나 젊은이 둘이 있다. 아르헨티나의 F와 A이다. 인사를 나눈 지는 며칠 되었지만 오늘은 길을 걸으며 꽤 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특히 F가 영화를 전공한지라 아내 오선생과 할 이야기가 많다. 이 친구는 제법 우리나라 영화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유명 감독과 배우들을 잘 알고 있고 많은 작품들을 보았단다. 남자 친구인 A와 한국과 아르헨티나에 관련한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처럼 오랜 군부 독재의 시기가 있었고 2000년 IMF에 구제 신청을 한 것도 비숫한데, 정치적 민주화나 경제적 사정이 한국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한때 남미에서 70% 이상이 백인인 나라로 세계적으로 부유한 나라였지만 지금은 그때의 영광을 찾기에는 역부족인 것은 사실이다. 


 한류 현상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고도 경제 성장과 민주화 수준도 상당해진 한국을 인사 치례가 아니라 실제로 부러워하는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한국 내에서 우리 스스로의 글로벌 위상을 평가하는 다양한 지표가 있겠으나 외국에서 평가하는 객관적인 자료들을 좀 더 많이 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카스트로 데 카스트로 마이오르 유적지 >

국도 옆길을 걷기도 하고 대체로 걷기 쉬운 평탄한 길들이 이어지다가 가끔은 오르막길을 오르기도 한다. 오르막길 끝에 너른 평원이 나오고 돌로 된 옛 집터와 성터의 자리가 잘 보존된 철기 시대 유적지가 있다. 이곳을 그냥 지나쳐 가기도 하는데 꼭 들러볼 만한 곳이다. 이곳에 자리한 도시가  ‘카스트로 데 카스트로 마이오르(Castro de Castromior)’였다고 한다.    


언덕길을 지나고 도로 옆길도 걷고 숲 속 오솔길도 걷는다.  몸에 누적된 피로도만 아니라면 갈리시아의 길들은 걷기 좋은 길임에 틀림없다. 자동차 통행이 잦은 길들도 먼지가 나거나 걷기에 크게 방해되지는 않는다. 어느덧 벤타스 데 나론(ventas de Naron)에 도착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큰 레스토랑의 옆에 작은 예배당이 있는데, 성당 안에서 인증 스탬프를 찍어주는 분이 앞을 못 보는 분이다.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 어둡고 협소한 공간에 감도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밖으로 나온다. 담장 너머 레스토랑에서는 식사하는 많은 사람들로 활기가 넘친다.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에서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다. 


포장도로를 따라 걷다가 리곤데(Ligonde) 산맥의 정상에 오른다. 바람이 좀 심하게 부는 것만 아니면 많이 힘들지 않다. 얕은 오르막을 몇 번 지나 리곤데(Ligonde) 마을에 도착한다. 

갈리시아 지방에서 특이하게 볼 수 있다는 라메이로스 꾸루세이로(Cruceiro de Lameiros) 십자가상은  17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형태가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되었지만 이 조형물이 주는 영적인 끌림이 있는 모양이다. 야고보의 성지를 앞에 두고 간절함이 더 절절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걸어오던 길에 대한 감사와 남은 길에 대한 무사 안녕을 비는 종이쪽지와 돌멩이들이 조각상 둘레에 가득하다. 


이제 남은 거리 70km, 자동차로 가면 한 시간 거리이지만 걸어서는 이삼일 더 가야 한다. 아직도 많이 남았구나 하는 생각보다는 이제 다 왔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뽀르또스(portos) 마을을 지난다. 

오랜만에 나타난 카페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우리는 그곳을 지나 낡은 종탑과 빨간색으로 단장한 고즈넉한 성당의 묘지가 보이는 담장에 걸터앉아 간식을 먹는다.


 관광객들과 순례자들, 우리처럼 30일을 걸은 사람과 중간 지점의 여러 도시에서 시작한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서 느낌이 다른 순례 행렬이 형성된다. 학생단체들도 많이 보이는데 그 이유는 스페인 정부가 학생 순례단 체험을 권장하여 학생 시절 누구나 이 길의 일정한 구간을 걷게 하기 때문이다.

 카톨릭 신앙이 곧 애국으로 합일하는 전통을 잇고 지역 간의 문화적 차이와 갈등과 분열 급기야 내전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라는 정책적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물론 아이들은 이 기간이 꽉 짜인 학업 일정에서의 해방되는 시간이고 한편 우정의 깊이를 더 돈독하게 할 수 있는 시간이 되리라.     

 

지루하지 않게 적당한 거리에 마을이 있고 늘어난 순례자들이 주는 활기 때문인지 힘든 줄 모르고 걸은 덕분에 오늘의 목적지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에 도착한다.      


 노천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던 순례자들이 우리를 보고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아마도 우리의 행색이 제법 먼 길을 온 고행자들의 모습으로 비친 모양이다. 아니면 우리가 초로의 동양인 부부여서 그랬을까? 아무튼 보내온 격려에 지친 몸과 마음이 포근해지며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에서 하루를 지내고 삼일 후면 드디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 de Commpostella)의 별이 빛나는 광장에 서게 된다.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바욘으로, 그리고 한 칸짜리 미니 열차로 생장에 내렸을 때는 온통 설렘과 두려움으로 가득했었다.  피레네를 넘고 800KM를 하염없이 걷던 그 비현실 같은 과거의 시간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먹먹함을 미리 상상해 본다. 이 상상은 어떤 성격의 것일까?  아내와 나는 길을 걷는 내내 서로 또는 각자의 내면에 질문하며 이 상상을 벼려 왔다. 이제 그 상상 속의 비현실이 현실이 될 날이 코 앞에 다가온 것이다. 혹시 미리 너무 많은 상상을 해버려 막상 현실이 무덤덤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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