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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이와 일이 Oct 19. 2022

34화 매일 새로운 길(32일 차)

(2022.4.25. 월)

*.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아르수아(Arzua)(29.4Km 7시 30분 출발- 17시 30분 도착)                         

 < 상세 일정 :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 0.0km) → 산 시아오 데 까미노(San Xiao do Camino 3.5km) → 우요아(Ulloa 4.5km) → 까사노바(Casanova 6.0km) → 오 꼬또(O Coto 8.5km) → 레보레이로(Leboreiro 9.5km) → 푸레로스(Furelos 13.5km) → 멜 리데(Melide 15.0km) → 산따 마리아 데 멜리데(Santa Maria de Melide 16.0km) → 라이도(Raido 18.5km) → 보엔떼(Boente 21.0km) → 가스따네다(Cadtaneda 23.5km) → 리바디소 데 디바이소(Ribadiso de Baixo 26.5km) → 아르수아(Arzua 29.5km)>


< By 개미(옥이) >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는 약간 분지형태로 되어 있어 안개도 자욱하고 습한 기운이 돕니다. 서고트의 왕 위티사가 그의 아버지 에히까의 치세 동안 갈리시아 지방의 총독을 맡아서 살던 궁전이 있어 ‘왕의 궁전’(El Palacio de un Rey)이라는 이름이 유래된 것이라 합니다.  


  숙소를 나오는데 자동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질주합니다. 아마도 바쁜 출근을 하나 봅니다. 불현듯 서울에서 정신없이 지냈던 몇 달 전이 떠오르며, 그 무한경쟁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다시 느낍니다.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를 나오니 큰 공장들이 있고 그 옆길을 거쳐 오솔길을 걸어갑니다. 큰 나무들이 적당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걷기에 편안합니다. 사리아 이후부터 순례길은 잘 조성이 되어 있어 누구나 수월하게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길을 걷는 것은 어제와 오늘, 매일이 다릅니다. 지루하고 단조롭게 느낄 때도 있지만 늘 길은 새롭습니다. 길을 새롭게 하는 것은 하늘이고 사람입니다. 흐리고 비 오는 날 걷는 것보다 해가 나고 온후한 길을 걷는 것은 훨씬 기분을 좋게 합니다. 길에서 만났던 사람을 또 만나도 새롭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즐겁습니다. 이 길에서는 찡그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누구를 만나도 ‘올라’ 인사를 하면 환한 미소로 답을 해주고, 먼저 인사를 건네 오기도 합니다. 까미노 순례길을 걷는 사람에 대한 무언의 격려이지요. 


  어제는 약간 우울하기도 했는데, 오늘은 또 행복하게 느끼는 것은 좋은 날씨와 만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리고 길은 인생과 같음을 반복해서 깨닫게 됩니다. 까미노 순례의 시작 길은 유소년 기와 같습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설렘과 좌충우돌 이리저리 부딪히며 걷다 보면 어느새 적응기를 거쳐 중년을 지납니다.  까미노 순례 후반 길은 지금 우리의 노년과 같습니다. 길의 끝에서 인생의 노년을 보고, 일의 성취를 앞둔 사람들의 조바심도 봅니다. 그 성취는 완성이자 또 다른 시작입니다.  이 까미노 순례길을 걸으려고 했을 때 이 길은 특별한 길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떤 환상과 신비로움 그리고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길일 것이란 기대로 시작했지요. 그러나 매일매일 길을 걸으면서 결국 이 길도 또 다른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환상을 쫒았던 이 길이 끝나면 그 앞에는 엄혹한 현실이 있을 것입니다. 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환상과 신비로움, 그리고 현실의 엄혹함 사이에 괴리와 모순이 존재합니다. 서로 공존하는 것이 상당히 힘든 세상이지요. 그러나 이 둘을 공존하게 하는 것, 꿈과 현실이 갈등하며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임을 이 길이 가르쳐 줍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을 보니 길의 끝이 가까워지는 것이 아쉬워서이겠지요.


 오늘 길은 아끼며 걷고 있습니다. 역방향으로 걷는 노부부가 있습니다. 아마 차를 타고 편안한 구간을 선택해 걷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길은 선택하는 사람들의 몫이겠지요. 

 꽤 많이 걸어온 듯해 카페에 들어가니 한국 가족 일곱 명이 앉아 있습니다. 사리아에서 출발한 세 자매 가족입니다. 화목한 모습에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32일째 걷고 있다고 했더니 좋아 보인다 하네요. 물론 빈 말이겠지만 몸의 변화를 실제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애써도 안 들어갔던 배가 홀쭉 해지고, 다리는 근육으로 단단해졌습니다. 오기 전 건강 문제로 자신 없어하던 남편의 여러 증상들도 씻은 듯이 없어졌습니다. 이 또한 신비스러운 선물이 아닐까요?  나이 들고 몸에서 이런저런 신호를 보낼 때 두려움과 의욕이 꺾이는 것을 이곳 까미노 순례 길을 걸으며 자신감을 회복합니다.

< 뽈뽀 요리와 와인으로 충전시키고 >

  멜리데(Melide)는 매우 큰 도시입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순례자들로 북적거립니다. 오늘 점심은 좀 거하게 먹습니다.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이 지금 걸어온 만큼 남았지만 그 유명한 문어 요리와 화이트 와인으로 고생한 몸을 위로합니다. 그런데 좀 과음을 한 듯하네요.

  멜리데를 나와서는 바로 한적한 시골길로 이어집니다. 가끔 도로 길과 산속 마을을 둘러 가게끔 하는 길을 선택하게도 합니다. 갈 길이 멀지 않은 우리는 늘 둘러 가는 길을 갑니다. 그 길은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 같다는 기대 때문이지요. 호젓하게 걸을 수 있고, 아직도 남아 있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결혼생활 34년의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그 많은 시간 속에 기쁨만 있었던 것이 아니지요.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도 서로를 이해 못 했던 적도 있었음을 서로 털어놓습니다.


  어느새 길은 산모퉁이를 돌아 느티나무 숲이 우거진 내리막길이 나옵니다. 리바디소(Ribadiaso) 마을이 나오고 다리 앞에 랄프 일행이 쉬고 있습니다. 남편과 제가 노래를 부르며 들어가는데 랄프 일행과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호응합니다. 작은 마을에서 잠시 쉬어 갑니다.

< 순례 체험학습 중인 학생들과 함께 >

  여러 정보에 의하면 아르수아(Arzua) 길이 엄청 힘들 것이라 하여 잔뜩 긴장했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리바디소(Ribadiaso)와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3km를 더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이제 여기부터 39.7km를 더 가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합니다. 조금 전 H랑 통화를 했는데 벌써 도착해 있습니다. 마음이 바쁘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더 남겨두고 싶은 두 마음이 드는 날입니다.

  아르수아 숙소는 2층으로 된 가정집을 개조하였는데, 모네와 르느와르 그림이 걸려 있고, 2층은 서재로 사용되었던 듯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편안한 가정집 같은 알베르게입니다. 하루만 머물기에는 아까운 정말 편안한 공간입니다.

 내일은 또 오늘과 다른 어떤 느낌으로 산티아고 입성 전야를 맞이하게 될까요?      


    


< By 베짱이(일이) >


 서고트의 왕 위티사는 아버지의 재위 시절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에 머물렀고, 그 후에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701년 공작 로드리고의 반란으로 왕위를 빼앗겼고, 이에 위티사를 지지하는 총독과 주교 등이 북부 이슬람교도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는 로마와 서고트의 지배 이후 오랜 기간 이슬람 지배를 받으며 다문화 적이고 융합적인 독특한 특성이 남게 된다.  ‘레콩키스타(Reconqui)’는 가톨릭 연합 세력이 이슬람과 반 가톨릭 세력을 몰아내려는 배타적이고 경직된 정책이어서 스페인이라는 가톨릭 왕국을 건설하였으나 이베리아는 북유럽이나 중부 유럽과는 다른 독특한 혼합 문화가 혼재되어 있다.  


갈리시아(Galicia) 지역은 카스티야(Castilla)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을 지속한 지역이었고 언어나 문화가 포르투갈과 많이 비숫한 곳이다. 야고보 성지를 보유하고 있는 이곳 나름의 자부심과 독특한 정체성을 길을 가며 느낄 수 있었다. 산티아고 길 내내 세심하게 이정표를 만들고 소의 분뇨를 정성스레 수거하는 모습에서 자기 지역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갈리시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어느 길이든 지루하지 않고 걷기 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리아(Sarria)부터는 마을과 도시의 분위기가 사람들이 많아져 순례보다는 관광의 비중이 커지는 유명 관광지의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세계의 어느 성지나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고, 성(聖)과 속(俗)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혼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편하게 받아들인다. 이 또한 순례길이 주는 가르침 중 하나이리라.  

산속에 혼자 있어도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릴 수 있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자기 줏대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없는 호젓한 산길도 좋았고 이렇게 사람들이 북적이는 활기찬 길도 또 다른 매력이 느껴진다. 목적지가 다가올수록 생기는 여유가 마음을 더 열게 한다.  

이 길을 왜 걸었고 또 무엇을 생각하며 걸었는지, 초심을 더듬어 찾으며 옷깃을 여민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길을 걷는 노부부를 본다. 길은 내가 가는 길만이 길이 아니고 방법도 방향도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정원이 넓고 꽃과 나무로 잘 단장된 카페에서 좀 쉬어가려다 우연히 한국 가족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한국말로 인사를 나눈다.  남편과 자녀 둘 그리고 동생 둘과 함께 스페인 여행을 와서 사리아부터 순례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매우 좋아 보이고 부러운 마음도 들어서 아내에게 우리도 가족과 함께 이 길을 걸을 날을 꿈 꾸어 보자고 한다.      

< 멜리데 입구 >

멜리데(Melide)는 예상보다 큰 도시다. 오랜만에 도로에 차들이 늘어선 모습이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거대한 인물 벽화도 인상적이다. 아내가 매일 글을 써서 올리는 인터넷 카페에서 정보를 얻어 그 유명한 문어 요리 뽈뽀(Pulpo)를 잘한다는 식당을 찾는다. 이전에 포르투갈에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역시 식당에는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겨우 자리를 잡고 인상 좋은 젊은이의 친절한 안내로 주문을 한다. 점심이지만 화이트 와인도 곁들인다. 오늘 오전 잘 걸어 준 몸에 대한 보답이다.      


너무 일찍 긴장을 내려놓았는지 조금씩 지치기 시작한다. 4월 중하순 갈리시아의 오후 햇살은 매우 따갑다. 이어지는 한적한 숲길에서 얼마 남지 않은 우리 둘의 순례길을 정리해 본다. 이 길이 끝나면 시작될 아직 가지 않은 길을 우리는 함께 또 따로 가야 할 터이다. 

은퇴의 시간은 산티아고 이후에 어떻게 전개될지, 과거를 되새김질하며 은퇴 부부의 팀워크를 다진다.  


 우리는 걷기 시너지를 내기 위해 오랜만에 노래를 부르며 마을 입구부터 카페와 알베르게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는 길을 걷는다.  학생 순례단이 머무는 곳으로 보이는 카페 겸 알베르게를 지나는데 학생들이 느닷없이 우리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장난기 섞인 표정의 학생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잠시 쉬어 간다. 독일 청년 R 일행도 만났다. 이곳이 리바디소 데 바이소(Ribadiso de Baixo) 마을이다.  우리는 아르수아(Arzua)까지 3km를 더 가야 한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힘에 부치는 것을 알고 잔뜩 긴장하며 걸었는데 어느새 아르수아에 도착한다. 치즈로 유명한 아르수아는  생각만큼 작은 마을이 아니다.  아르수아 성당을 중심으로 언덕 위로 이어진 시가지가 아담하면서도 규모 있게 펼쳐져 있다. 마을 서쪽에 있는 우리 숙소는 2층으로 된 가정집으로 널찍한 지하 주차장에 세탁실이 있고 정원도 멋진 알베르게이다. 이 층 우리 방 옆은 예전에 서재로 쓰였던 듯 그 모습 그대로이고, 모작이지만 모네와 르느와르 그림도 걸려 있다. 나이 든 부부의 삶의 흔적이 느껴진다. 실로 오랜만에 빨래도 해 널고 차를 마시며 편안한 마음으로 지는 해를 감상한다. 성당 뒤 오래된 로컬 레스토랑을 찾아 우아한 식사를 한다. 해가 기운 4월 하순의 아르수아는 날씨가 쌀쌀하다. 서둘러 숙소로 돌아와 따뜻한 샤워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틀만 더 걸으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다. 묘한 감동으로 깊어가는 아르수아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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