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26. 화)
*. 아르수아(Arzua)-오 아메날(O Amenal) (22Km 8시 30분 출발- 17시 00분 도착)
<상세 일정 : 아르수아(Arzua 0.0km) → 쁘레곤또뇨(Pregontono 2.0km) → 아 빼로사(A Peroxa 3.0km) → 깔사다(Calzada 6.0km) → 깔레(Calle 8.0km) → 보아비스따(Boavista 9.5km) → 살세다(Salceda 11.0km) → 오 센(O Xen 12.5km) → 라스(Ras 13.5km) → 브레아(Brea 14.0km) → 아 라비냐(A Rabina 14.5km) → 오 엠빨메(O Empalme 15.5km) → 싼타 이레네(Santa Irene 16.5km) → 아 루아(A Rua 18.5km) → 빼드로우소(Pedrouzo 19.5km) → 산 안톤(San Anton 21km) → 오 아메날(O Amenal 23km) >
이른 아침 창문을 여니 보랏빛 여명 속에 구름 사이로 새들의 합창 소리가 들립니다. 모처럼 호텔 같은 알베르게에서 편히 잤습니다. 늘 저녁에는 다리도 아프고, 몸이 노곤해져 정신없이 잠들곤 합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몸은 회복되어 다시 상쾌하게 걷게 됩니다.
생장 오기 전 파리에서 예행연습차 걷기 투어를 했습니다. 어찌나 힘들고 지치던지, 이런 체력으로 과연 산티아고를 걸을 수 있을까? 걱정을 했습니다. 피레네를 넘으면서도 기다시피 오르며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염려가 컸지요. 그런데 이제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롯이 이 두 발로 하루도 쉬지 않고 묵묵히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몸과 마음이 더 단단해졌음을 느낍니다. 지난 32일 동안 온전히 하늘과 대지와 풀과 나무와 호흡하고 그들이 보내주는 에너지를 듬뿍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기계화된 도시 문명 속에 살면서 꾸역꾸역 집어넣었던 것들을 하나하나씩 비우고 나서인지 몸이 가벼워졌습니다. 결국 몸도 자연의 일부였던 것인데, 그 본연의 모습을 잊고 살았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맑고 건강해진 몸에 담긴 영혼 또한 똑같이 회복의 과정을 거쳤겠지요.
아르수아(Arzua)를 나와 걷는 길도 넓은 목초지와 떡갈나무 숲 속 오솔길입니다. 크고 작은 시골마을을 지납니다. 경쾌한 음악 소리가 들려 뒤돌아 보니 블루투스 스피커를 든 학생들 무리가 다가옵니다. 발렌시아에서 온 학생들로 트리아 카스티야부터 시작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6일 동안 걷는다 합니다. 우리나라 학생들도 이런 프로그램을 해보면 찌든 입시경쟁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뒷모습만 보고도 한국인인 줄 어찌 알았는지 발랄하게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를 해옵니다. 필리핀 아줌마 친구들인데 BTS 덕후들인가 봅니다. 멤버들 이야기를 하며 함께 사진도 찍습니다. 이 까미노 길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을 알고 있어 새삼 놀라게 됩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누는 웃음 에너지와 소나무, 떡갈나무가 어우러진 완만한 경사 길은 걷는 것에 행복을 줍니다.
어느덧 살세다(Salceda) 마을을 벗어나 오솔길을 따라 걷는데 길가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하루 남기고 유명을 달리한 기예르모 와트를 기리는 기념비입니다. 평소 그가 까미노 순례길에 신었던 신발을 조각한 것이 더 가슴에 와닿습니다. 청동 등산화 안에 순례자들이 놓아둔 꽃과 각종 기념물들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을 똑같이 걷다가 도중에 운명한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이 길을 걷고 있는 이 순간의 가치와 의미를 더욱 절실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삶에게 주는 교훈보다 더 한 감동이 있을까요. 그래서 이들의 죽음은 저에게 더욱 숭고한 것으로 다가옵니다.
길은 늘 겸손을 가르쳐줍니다. 이제 산티아고도 얼마 남지 않았고, 걷는데 익숙한 우리는 날씨 예보에 무심했습니다. 뜬금없이 맑은 하늘 저편이 어둑해지더니 비가 쏟아집니다. 비옷을 보내 버려, 우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습니다. 비를 긋기 위해 들어온 레스토랑은 순례자들로 좌석이 꽉 찼습니다. 기대하지 않고 순례자 메뉴를 주문했는데, 음식이 너무 맛있습니다. 비 때문에 속상했던 마음이 다시 쨍하고 나타난 해님처럼 좋아집니다. 더구나 서빙하는 잘 생긴 젊은 친구가 음식마다 “good?” 하며 확인하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비가 그쳐 좋기는 하지만, 사실은 우비를 뒤집어쓰고 걷는 순례자들의 행렬이 고행하는 까미노 길의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는 합니다. “ㅇㅇㅇ가 방정”이라는 말이 있지요. 금세 맑은 하늘에 장대비가 쏟아집니다. 까미노 순례길에 대한 아쉬움을 하늘도 아시나 봅니다. 비 때문에 갈 길이 더뎌집니다. 평소 같으면 조급증이 났을 텐데, 오히려 이 모든 것이 마지막 남은 하루의 아쉬움인 것 같아 이마저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비가 그치고 또 일어날 때입니다.
아침에 만났던 학생들 중 마지막 남은 그룹이 반대편 카페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다가 뒤늦게 들어오는 선생님을 향해 환호의 함성을 지릅니다. 조용하던 까미노 길가에 활기가 넘칩니다. 도로 옆 오솔길을 따라 걷는데 또 소낙비가 쏟아집니다. 마침 굴다리가 있어 잠시 비를 긋습니다. 주룩주룩 내리던 비가 또 잠잠해지며 해가 납니다. 갈리시아 날씨는 종잡을 수 없으나 느긋하게 조금 기다리면 됩니다. 앞에 양을 몰고 가는 산티아고처럼 선생님이 학생들을 쭉 몰고 갑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표지석이 나올 때마다 줄줄이 터치를 하고 깔깔 대며 길을 갑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며 쫓아가다 보니 오 페드로우스(O Pedrouzo)가 나오고, 학생들과 헤어져 우리는 계속 걷습니다.
화분에서 작은 유칼립투스만 봤는데, 이곳은 미루나무처럼 쭉쭉 하늘로 치솟아 있습니다. 유칼립투스 군락을 돌아 오늘의 숙소 오 아메날(O Amenal)에 도착합니다. 번잡스러운 곳을 피해 마을 하나를 더 왔는데 우리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군요. 예약된 숙소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앉아 있던 많은 사람들이 환영의 손뼉을 쳐 줍니다. 아마도 목적지를 하루 앞둔 흥분과 설렘이 통했기 때문이겠지요. 오늘은 이곳에서 마무리하고 내일은 드디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입성합니다. 남편에게 초심으로 돌아가 배낭을 지고 가자 했더니 흔쾌히 “그러자” 하네요. 이제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데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입성 전야를 남편과 조촐하게 보내면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보렵니다.
오늘은 산티아고 입성 전 날이다. 오 아메날(O Amenal)까지는 23km로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거리이다.
어제 3km를 저축해 둔 덕이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몸이 단단해진 모양인지 허리도 다리도 발도 아프지 않고 자고 일어나면 정신도 맑아져 있다. 아침 공기를 마시며 걷기 시작하면 4월의 태양은 내가 걷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내 뒤를 따라오다가 나를 저만큼 앞서 갈 때쯤 걸음을 멈추게 한다.
걷고 먹고 자고 또 걸었다. 오늘이 33일 째이다. 하루도 쉬지 않고 걸었다.
내 인생에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선뜻 나서지 못하고 망설일 때 아내가 나의 길잡이가 되어 먼저 걷고 있었다. 내가 따라나선 것은 아내의 결기가 너무 시퍼래서 꺾일 것 같지 않아서였다. 이 길에 대한 마음의 준비와 사전 지식과 의지도 부족한 상태에서 길을 나선 것이다.
어찌 보면 내 인생 전체가 그랬다. 우물쭈물 망설임 속에서 시작된 일이 나를 이끌었고 그 일의 과정에서 조금씩 성장했다. 사회적 자각과 사람들이 주는 지혜와 용기와 격려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왔다. 특히, 교직에서 만난 어린 학생들의 순수함이, 이 순수함을 지켜주려는 따뜻한 열정을 지닌 동료들이 교육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나를 힘들게 한 것도 세상이고 사람이었지만 힘들고 상처 입은 나를 격려하고 치유의 힘을 준 것도 그들이었다. 특별히 카톨릭의 성지로 가는 순례길이 종교적 깨달음이나 신비한 영감을 준 것은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길은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내가 살아온 과거를 정리해 볼 수 있는 귀한 시간들이고, 끝이 아닌 새로운 출발점 앞에서 용기와 희망이 하루하루 쌓여 왔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키가 큰 소나무와 참나무 숲길을 걸으며 체험학습 온 단체 학생들도 만나고, BTS를 좋아하는 필리핀계 아주머니들도 만나며 다양한 순례의 목적을 두고 걷는 사람들을 만난다. 순례길의 종착지를 하루 앞둔 설렘을 가슴에 안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 더욱 행복하다. 결국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은 이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 아닌가? 이 길을 걷고 난 후 각자 자기 장소로 돌아가 힘차게 살아가겠지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살세다(Salceda) 마을이다. 벌써 절반 정도 걸은 셈이다.
마을을 벗어나 오솔길을 따라 걷는데 길가에 기념비가 있다. 야고보의 성지를 하루 남기고 유명을 달리한 ‘기예르모 와트(Guillermo Watt)’의 동(銅)으로 된 신발 조각상을 보며 우리의 발을 내려다본다. 바로 오늘 우리처럼 이 길을 걷고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맑았던 하늘에 짙은 구름이 몰리더니 이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얼마 남지 않은 일정에 비가 오지 않을 거라며 방심했던 우리에게 주는 이 길의 마지막 경고 같다.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걷다가 다행히 가까운 거리에 레스토랑이 있어 비를 긋기 위해 들어간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들인지 발 디딜 틈이 없다. 운 좋게 빈 좌석이 하나 있어 ‘순례자 메뉴’를 주문해 먹었는데 의외로 맛이 있다 비가 준 선물이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지나쳤을 레스토랑에서의 맛난 식사가 가져다준 반전이 또 한차례 머리를 친다.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이 식당의 넓은 창 안으로 밝게 퍼진다. 야고보 성지에서 밤에 별을 보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데 이곳 갈리시아의 날씨는 흐리고 비가 이따금씩 내려 마음 한편이 불안하다.
얼마를 걸었을까? 진창길을 피해 걷느라 신경이 쓰인다. 생각해 보니 우리 등산화는 발이 편하고 방수도 잘되어 눈길과 빗길을 오래 걷고 난 뒤에도 발이 젖지 않고 물집 한 번 잡힌 적 없으니 참 고마운 신발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또 한차례 먹구름이 지나가며 소낙비를 뿌린다. 마침 굴다리가 있어 비도 긋고 다리도 쉬어간다. 비가 그쳐 마침 지나가는 학생 순례단의 뒤를 따른다. 재잘거리고 장난을 치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더욱 경쾌하다. 오 페드로우스(O Pedrouzo) 마을이 나오고, 학생들은 오늘 이곳에서 머물기 위해 숙소로 향한다. 우리는 쉬지 않고 내쳐 걷는다.
키가 큰 유칼립투스 군락의 멋진 숲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머지않아 큰 도로가 나오는데 여기가 바로 오 아메날(O Amenal)이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그 길을 따라 마을 외곽에 있다. 아마 내일 출발하기에는 유리한 위치일 것이다.
숙소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앉아 있던 많은 사람들이 환영해 준다. 성지 입성을 하루 앞둔 동질감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리라. 오늘 밤은 내 인생에서 역사적인 밤이 될 것이다, 오랜만에 도수 높은 리오하 와인을 마시며 내일의 벅찬 감회를 미리 당겨 아내와 나눈다. 우리 둘은 이 길을 다 걷고 난 후에 세상이 이전과 어떻게 다르게 보일지 몹시 궁금하다. 산티아고 순례 시작 전의 파리 여행과 생장 피에 드 포르에서부터 걸어온 33일을 되짚어 보며 감격과 흥분으로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