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증
건강 검진을 받았다. 매번 검진을 받아보지만, 받을 때마다 염려증이 도진다. 비교적 담담한 편인데도 검진받기 위해 병원 문 앞에 설 때 오는 두려움은 숨길 수 없다. 일주일 전에 내시경 예약일을 지정하고, 검사 전 주의 사항과 검사제 복용 안내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부터 염려증이 시작된다.
그럴 거면 진즉부터 하면 될 것을 연초부터 계획해 놓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연말에 몰려서 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돼버렸다. 그래도 재작년에 연말을 앞두고 한 것에 비하면, 12월 초에 했으니 부끄럽지만, 꽤 당긴 셈이다.
시간에 얽매인 직장인도 아니고 어느 날이든 시간을 내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번번이 미루는 것을 보면 검진 결과에 미리 겁먹어서 그런 것도 있다. 좋아하는 일은 망설이지 않으면서 급하지 않은 일은 간혹 미루기 잘하는 습관도 한몫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결과의 두려움이란 암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일 테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결과로 미리 상상하고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특별한 병세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애써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더 큰 병을 키우지 않고 이제라도 발견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더 빨리 치료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다행히 이번 검진 결과는 암 씨앗이 될 수도 있는 것을 제거했고, 그 외는 양호하다고 하니 하지 않아도 될 마음고생을 사서 한 것 같다.
인명은 재천이라 생각하면 무엇이 그리 두려울까. 아이들 성장시켜 출가하고 자기 밥벌이 다 하겠다, 부모 손 필요할 때는 이미 지나갔다. 이제 좀 살만하니까 좋은 세상 누려보고 싶긴 하다. 아직 아쉬울 수 있는 나이라지만 그렇다고 생로병사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면 하등에 쓸모없는 생각인데 말이다.
2년마다 하는 기본 검사에 중요한 검사에서 몇 가지 추가하는 것으로 관리해 나가고 있다. 특히 내가 사는 곳은 주민이 7천여 명이 채 되지 않은 작은 읍 소재라서 정밀한 기계를 갖춘 병원이 없다. 내시경 등 중요 검사를 할 만한 병원이 없기에 도시로 나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던 중에 6년 전에 읍내에 설립된 병원에는 내시경과 초음파검사를 겸한 이 병원만의 특화된 건강검진 프로그램이 있다. 종합검진받는 것이 아니라면 부담되지 않은 비용으로 내시경과 초음파검사를 할 수 있어서 지역 주민들에게는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
우선 신축 건물의 산뜻하고 따뜻한 실내장식과 최신 기계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기대감도 컸다. 특히 큰 비용과 시간을 들이지 않는 것과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되는 번거로움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 효과는 좀 더 세밀한 검진을 받기 위해 진료 대기 시간이 길어지는 것으로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검진을 받고 다수의 암 환자를 발견한 사례가 있어서 족집게 의사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좀 더 정밀한 검사를 위해서는 대형 병원으로 가야 하겠지만, 읍 소재의 작은 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획기적이다. 실제로 4년 전에 아주 건강해 보이던 가족의 친구가 이곳에서 폐암을 발견하고 1년여를 투병하다 돌아가셨다. 대학 병원 선호도가 있어서 처음엔 신뢰감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믿음을 갖고 가까운 곳에서 조금 더 일찍 1차 검진받았더라면 회복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 같았는데 아쉬움이 크다.
일찍 발견하고 제때 치료를 해서 좋아진 분들도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뢰도가 높아진 것 같다. 지난 2월, 우리 가족도 검진에서 발견된 대장 폴립이 악성일 수도 있다는 소견에 온 가족이 공포스러웠던 적이 있다. 그 후 대학병원에서 정밀검사 후 음성으로 최종 판정받고서 안심하게 되었다.
실제로 조직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지만, 모양과 크기가 악성으로 여겨질 만큼 제법 커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엔 의사 선생님의 얼토당토않은 고집이 두려움을 준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고집스러운 의심이 없었으면 방심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기회로 대장 폴립의 정보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물론 건강 검진도 미루지 않고 제때 잘 받아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됐고, 건강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때마다 정기 검진 때면 30분 거리의 시청 소재지로 나가야 했던 것을, 우리 집에서 몇 발짝만 걸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 작은 읍내 병원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다음 검진 때는 염려증 놓아두고 일찌감치 서둘러서 연말이 다가오도록 조급하고 염려증 내는 바보짓은 안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