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치끝이 막히고 알 수 없는 무언가 가슴을 답답하게 누르는데,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아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요즘 들어 젖은 낙엽처럼 땅에 붙어버린 느낌이다. 마음이 가라앉아 책을 읽어도 집중력이 떨어지고 활자의 자음과 모음이 둥둥 떠다닌다.
저면관수 하려고 담가놓은 재스민 꽃나무의 누런 잎새가 대형 그릇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이 꼭 나 닮았다고 생각했다. 차 있는 것 같아도 실제는 비어 있고. 단단해 보여도 겨우 버티고 있었던 겨울 잎새 같다. 파란 잎새와 향기로 넘어선 여유로움이 내겐 속없이 둥둥 떠 있는,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을 잎으로만 보였을까.
아침에 이웃의 글을 보고 왜 울컥했는지 이제야 감이 왔다. 이웃의 글은 그래서 좋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글로 전해받는 메시지가 현재 내 처지와 딱 맞아떨어지고 마음이 동하면 그만이다.
글은 자취생활 하면서 겪은 청국장 끓이기 실패 경험담이다. 손님 접대하려면 평소보다 맛나게 하려고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엄마가 끓여주신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다. 냉장고를 뒤져서 꾹 눌러 두었던 우렁이도 꺼낸다. 맛을 낼 수 있는 것들을 죄다 찾아서 이것저것 넣고, 엄마 맛을 재현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에 선해서 웃음이 나왔다.
가족의 입맛에 맞게 맛 내기에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왔어도 엄마 손맛을 흉내 내는 것이 불가능한 줄 안다. 청국장 한 숟가락 푹 퍼서 냄비에 으깨어 젖고, 파 한 자락 뚝뚝 잘라서 넣고 멸치 몇 마리만 넣어도 청국장 고유의 맛이 완성된다.
그 이유는 엄마 손에 품고 있는 사랑의 온도에 맞춰 끓인 것이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렁이를 넣은들 제맛 내기 어려운 것이 엄마 손맛이다. 결국 조미료 한 숟가락 넣어야 가까운 맛을 겨우 낼 수 있다. 나이 앞에서 절대 따라갈 수 없는 밥그릇 숫자와도 같은 것이다.
조미료는 신의 한 수다. 내 딴에는 고깃국을 정성껏 끓여서 어머니께 가져다 드리면 제맛이 안 나고 싱겁다는 눈치다. 짠맛과 칼칼한 맛이 밴 어머니에겐 이도 저도 아닌 맛이니, 소금과 조미료 한 꼬집을 넣고 나서야 화색이 돌고 맛있게 드신다.
우리 아들이 가끔 집에 오면 ‘엄마가 해준 집밥 먹을 때 제일 행복하다’라고 한다. 타지에서 홀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외식에 길들 만도 할 텐데 돈가스보다 엄마가 해준 제육볶음, 김치찌개가 더 맛있다고 하니 은근히 기분 좋긴 하다. 내가 엄마의 손맛을 그리워하듯이 아들도 엄마 손맛을 느끼고 싶었을 테니까.
엄마를 생각나게 하는 글을 마주하면 코끝이 찡해지고 그리움이 밀려온다. 아침에 만난 이웃의 글이 그랬다. 마음이 약해졌나? 나이가 들었나? 아니다 나이는 무슨. 흥미롭게 쓰인 실패한 청국장의 추억일 뿐인데 내게는 엄마의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재스민 잎새처럼 둥둥 떠 있는 나를 꼭 안아 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