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의 잔인함
인스타그램을 보면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가장 심심치않게 보이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의 셀카.
SNS에 올라 온 사진 속 인물들은 화장과 조명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마치 이미지처럼 느껴졌다.
그런 사진들을 볼 때면 문득 '이 사람은 이 얼굴로 살아가고 있나, 이 얼굴에 자신을 맞추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누구나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고 다듬는 시대다.
그러나 그 끝은 어디일까.
영화 〈어글리 시스터〉는 그 끝에 있는 이야기다.
외모 중심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나아가기 위해, 결국 자기 자신을 버리기로 결심한 한 사람의 이야기다.
고전 동화 ‘신데렐라’ 속 이름도 없이 기억되는 의붓언니들 중 하나, 엘비라.
〈어글리 시스터〉는 바로 그 엘비라를 중심에 둔다.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로 조롱당하던 존재. 이번엔 그녀가 주인공이다.
엘비라는 처음엔 스스로를 꾸민다. 작은 시술, 억지 웃음, 구겨진 태도를 편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벽은 높고도 멀다. 그녀는 점점 자신의 신체를 잘라낸다.
칼을 대고, 비틀고, 절단하며 변해간다. 아름다워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견디기 위해.
영화는 자해와 절단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자신의 몸을 지우고 있는지 묻는다.
살을 빼고, 색을 바꾸고, 주름을 없애고, 근육을 붙이는 일.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그 모든 행위는 엘비라의 절단과 다르지 않다.
몸은 자신의 것이면서도 가장 먼저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는 공간이다.
엘비라는 결국 인간이기를 포기한다. 자신의 신체를 인간의 형태로 유지할 이유를 더 이상 찾지 못한다.
이야기는 점점 괴물로 변해가는 엘비라를 따라간다. 그러나 가장 괴물 같은 존재는 정작 화면 바깥에 있다. 그녀에게 '추하다'고 말하는 시선, '아름다워져야 한다'고 강요하는 목소리.
〈어글리 시스터〉는 고전 동화라는 틀을 빌려, 오히려 판타지를 모두 걷어낸다.
왕자도, 마법도, 해피엔딩도 없다. 남는 건 껍데기뿐인 육체와, 그 안에서 부서진 자아뿐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손을 놓지 않는다.
절망을 말하면서도 그 모든 행위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음을 계속 짚는다.
감독 에밀리 블리치펠트는 신체에 대한 연출을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히 통제된 리듬으로 구성된 신체 공포 장면들은 관객의 감정을 무겁게 끌고 간다.
배우 레아 미렌은 말 그대로 자신을 찢어낸다.
그의 얼굴은 장면마다 조금씩 다르다. 아니, 매 장면에서 ‘같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흔들린다.
특수 분장과 의상이 만들어낸 괴물은 단지 외형이 아니다. 감정도, 표정도, 태도도 모두 달라진다.
영화는 단순히 충격적인 연출로 주목받은 것이 아니다.
선댄스, 베를린, 브뤼셀을 거치며 그 강렬한 문제의식과 장르적 완성도 모두를 인정받았다.
로튼토마토에서 신선도 98%를 기록한 이유도 바로 그 점에 있다.
“10년간 등장한 공포영화 중 가장 인상적이다”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를 완전히 재구성했다”
〈어글리 시스터〉는 말 그대로 ‘현실’을 보여준다. 환상도, 위로도 없이.
자기 몸을 계속 바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영화 속에만 있지 않다.
일상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조금씩 '엘비라'처럼 살아가고 있다.
다른 이름으로, 다른 얼굴로.
영화는 나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 누구의 얼굴로 살아가고 있느냐고.
그 얼굴을 사랑하느냐고.
그 사랑은 네가 시작한 것이냐고.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나 역시 거울 앞에서 고개를 돌린 적이 많았다는 것이다.
피부를 만지다, 한숨을 쉰 적이 많았다는 것이다.
〈어글리 시스터〉는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가진 폭력성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리고 그 끝에서 묻는다.
당신은 괜찮은가.
이 얼굴로, 이 몸으로, 이 이름으로 살아가는 게 괜찮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