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커피머신이 멈춘 사무실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복도 끝 형광등이 깜빡거렸고, 컴퓨터 화면 속 문서만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때 문득, 모니터 옆에 붙은 메모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버티기.’
별 뜻 없이 붙여둔 말이었는데, 그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그 문장 하나가 드라마 ‘태풍상사’를 떠올리게 했다. IMF 시절, 무너져가는 회사를 다시 일으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불안하고, 내일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래서일까. 그 시대의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들은 결국 살아냈다.
버티는 것이, 곧 사랑이었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드라마는 초보 사장이 되어버린 남자, 강태풍(이준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IMF 한복판, 하루아침에 무너진 세상 속에서 그는 회사와 사람을 다시 세우려 애쓴다.
사람들은 그를 ‘운 없는 청춘’이라 부르지만, 태풍은 자신을 ‘이기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의 아버지가 말하던 그 문장을 떠올리며.
“꽃은 피었다가 지는 게 아니라, 피었다가 이기는 거야.”
그 말은 인생의 축약처럼 들렸다.
피는 것도, 지는 것도 결국 싸움의 일부라는 뜻.
태풍은 아버지가 남긴 이 한 문장을 품고 회사를 다시 세운다.
그 무모한 의지가, 그 시대의 청춘이었을 것이다.
그의 곁에는 또 한 사람, 오미선(김민하)이 있다.
숫자에 강하고 마음은 단단한 경리.
열일곱에 부모를 잃고, 동생들을 키워내며 살아온 사람이다.
계산기를 두드릴 때마다 세상의 균형이 조금이라도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누군가는 단순한 일이라 말하겠지만, 그녀에겐 그게 삶의 모양이었다.
미선에게 ‘태풍상사’는 그냥 직장이 아니었다.
컵을 씻고, 영수증을 붙이고, 창문을 닦으며 하루를 쌓아 올리던 공간.
그 작은 일상이 무너졌을 때, 그녀는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웠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바로 강태풍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버팀목이 된다.
상사와 직원의 관계를 넘어, 같은 바람을 마주한 동료로.
‘태풍상사’의 풍경은 화려하지 않다.
기름때 묻은 책상, 낡은 전화기, 찢어진 장부, 그리고 벗겨진 페인트 벽.
하지만 그 안에는 희미한 온기가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는 사람들의 체온.
누군가는 커피를 내리고, 누군가는 거래처에 전화를 걸며, 누군가는 눈을 감고 잠시 기도한다.
그 일상이 쌓여서 결국 회사를 움직인다.
드라마 속 강태풍은 자주 울었다.
눈물이 많고, 남을 쉽게 믿는 사람.
그래서 상처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이 작은 날갯짓은 바람이 될 거야.
바다가 만나면 폭풍이 될 거야.
그리고 결국, 태풍이 되어 돌아올 거야.”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작은 날갯짓이 언젠가 태풍이 된다는 믿음.
결국 세상은 그런 믿음 위에서 굴러간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게 흔들리며, 누군가는 끝내 버텨서 다시 선다.
이준호는 인터뷰에서 “시대와 세대를 넘어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든 분께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고 했다.
그 말은 단순한 배우의 소감이 아니라, 드라마의 진심처럼 들렸다.
김민하 역시 말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시기가 있더라도, 결국 빛은 찾아올 거예요.”
그 한 문장이 모든 장면을 대신했다.
드라마의 배경은 과거지만, 감정은 지금이다.
그 시절 사람들이 버텼던 이유와, 우리가 오늘 버티는 이유는 다르지 않다.
세상은 여전히 어렵고, 삶은 여전히 묵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출근하고, 웃고, 사랑한다.
1997년의 청춘들이 태풍을 일으켰듯, 2025년의 우리도 각자의 바람을 일으키며 살아간다.
밤이 깊어갈수록, ‘오늘도 버티기’라는 메모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조용히 의자를 돌리고 불을 껐다.
창문 밖에는 작은 불빛들이 깜빡였다.
어쩌면 그 불빛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태풍일지도 모른다.
드라마 속 태풍상사는 결국 그런 이야기였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는 사람들.
그들이 남긴 눈물과 웃음, 그리고 버팀의 시간.
커피머신의 불이 다시 켜졌다.
작은 기계음이 사무실을 채웠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오늘도 버틴다는 건, 결국 살아 있다는 뜻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