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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쉬는 돌 Apr 08. 2022

할머니는 따뜻하다


#1.

아이가 아팠다.

나는 초보 엄마였고, 유모차를 끌고 소아과에 갔다.

병원 안에는 울고 보채는 아이들과 엄마들로 붐볐다.

접수만 해 두고는 컨디션이 안 좋은 아이를 다시 유모차에 태워 주변을 걸어 다녔다.

건물을 청소하시는 분인지, 허름한 옷을 입은 할머니께서 다가오셨다.

눈이 마주쳐서 나는 살짝 인사를 했다.

하얀 피부에 큰 눈을 가졌던 아이는 가는 곳마다 예쁘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다.

이번에도 의례 "아이고, 예쁜 아기가 아픈가 보구나." 하는 말을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할머니의 눈은 계속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인자한 얼굴로 나를 한참 바라보시던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 힘들자? 애 키우는 게 힘들어. 암, 힘들지. 잘하고 있는거여"

"......"

갑자기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나오느라 아마도 나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평소에도 아기 옷은 한참을 골라 입히고, 정작 나는 무릎 나온 바지를 겨우 걸치고 다닌 게 여러 번이었다. 그래도 아기가 예쁘다 얘기를 들으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었다.

육아서를 열심히 읽어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엄마였다. 매번 이게 맞는 건지 고민하고 후회했다.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자책감이 매일 따라붙었다.

그러면서도 내 모습을 돌아볼 겨를은 없었다. 내가 괜찮은지, 너무 지친 건 아닌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순간, 낯선 이가 주는 위로에 굳었던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다시 힘이 났다.


존재를 믿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분이 삼신할머니가 아닐까 하는 허튼 생각도 해 보았다. 본인이 점지해 주신 아기를 열심히 키우는 나를 한 번 보러 와주신 건 아닐까, 하고.



#2.

결혼 후 8년을 타지에서 살다가 남편의 근무지가 옮겨지며 다시 원래 살던 곳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 잘 적응하고 살았지만 문득 외로운 적도 많았었다. 곳곳이 익숙한 곳에 돌아오니 괜스레 마음이 든든했다.

얼마 후 짬을 내어 중학교 때부터 줄곧 들락거린 작은 찻집을 찾아가 보았다. 아직 문을 열 시간이 안되었는지, 안에서 딸깍딸깍 소리는 나는데 문은 잠겨있었다.

찻집 앞 오래된 골목길은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였다. 마치 내가 십 수년 전 그때로 돌아간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추억에 한창 빠져 있는데 한 할머니께서 다가와 나를 가만히 쳐다보셨다.

"아이고, 곱네. 무용 하우?"

"아.. 아니요. 그냥 아줌마예요."

긴치마에 타이즈를 신고 올림머리를 한 나를 보고 그렇게 생각하신 듯했다. 훅 들어온 다정한 말투에 당황했어도 그렇지, 굳이 아줌마라고 소속을 밝힐 건 뭐람. 순간 후회하며 멋쩍게 웃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던 길로 걸음을 옮기셨다. 그리고는 골목 끝 쪽에서 핸드폰을 꺼내 통화를 시작하셨다. 멀지 않은 거리라 나에게도 내용이 들려왔다.

"주인 양반, 밖에 누가 와 있어요. 손님인 것 같은데 문 좀 열어주지."

아마도 찻집 주인아주머니께 전화를 하신 듯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활짝 웃으신 후 골목을 돌아 들어가셨다. '내가 다 말해두었어, 잘 놀다 가'라는 듯이.

곧 삐걱거리며 문이 열리고 찻집 주인아주머니가 고개를 빼꼼 내미시더니 반색을 하며 내 손을 잡아 끈다.

"혹시, 이 학생 맞지요?"

찻집의 한편에 몇 장의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그곳에 십 수년 전의 내가 있었다. 희미하게 그날이 떠올랐다.  대학생 때 찻집에 왔다가 우연히 옛 국어 선생님을 만났었고, 이것도 기념이니 사진을 찍자고 해서 주인아주머니와 셋이서 찍었던 사진이었다.

순간 예전의 그때로 훅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찻집 안의 모든 것 그대로였다. 예전 그 자리에 앉아 여전히 맛있는 차를 마셨다.

나는 결혼해 아이가 있다고, 열심히 사느라 와 보지 못했지만 그리웠다는 것. 아주머니는 오래된 손님들 소식과,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 촬영 배경으로 나오게 된 것까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 갖다 주라며 한아름 안겨주신 감자를 들고 찻집 밖으로 나오는데 마치 시간여행이라도 한 듯 얼떨떨했다. 오랜만에 온 줄 아시는 듯 따뜻하게 대해주신 낯선 할머니의 마음과 모든 것이 그대로인 그곳,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환영.

새것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이렇게 오래된 것들이 주는 묵직한 위로가 분명 있다.


그나저나 나는 할머니들과 무언의 공감대가 있는 모양이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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