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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쉬는 돌 Jan 20. 2023

내 3120페소는 어디로 갔을까


또한번 뭔가 대단한 반전이 있으려나 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안정제까지 먹어야 했던 나의 불안감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기내에서 더욱 꿀맛이라는 컵라면까지 챙겨먹고도

잠들지 않는 나의 2호기 덕분에 꼬박 5시간을 눈을 맞추며

세부 막탄 공항에 도착했다.


어학원에서는 말했었다.

내 조카가 부모님 없이 입국하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혹시나 운이 좋아서 입국심사대에서 묻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비용은 3120페소, 한화로 약8만원 정도.

나와 성이 같은 아이라서 일부러 나와 짝을 지어 입국심사대에서 기다렸다. 혹시나 운 좋게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면 맛있는 한끼를 먹겠다 생각하며.


사람이란 이리도 간사하다.

단 몇시간 전만 해도 무사히 게이트만 통과하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았는데. 아무일 없이 비행을 마치고 나니 적은 돈이라도 아끼면 좋겠다는 요행을 바란다.


입국 심사대에 서자마자 심사관이 묻는다.

-니 아들이야?

-아니, 내 조카야.

-아빠는 어디있어?

-그냥 나랑 같이 왔어. 공부하려고.

-그럼 저기 가서 돈 내고 와.

-오케이.


두근거리던 마음이 허무하게도 몇 초만에 나는 옆 문에 앉아  돈 내는 순서가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들은 모두 웃었다. 대충 둘러대지 그랬냐고. 며칠간 함께 여행하기로 해서 동행한 남편은 제일 크게 웃었다. 너는 정말 융통성도 없다며. 그래. 나 융통성 없다 뭐. 흥칫뿡


출발하기 얼마 전 집안을 뒤져보니 예전 여행에서 쓰고 남은 페소가 있었다. 그런데 필리핀은 이미 지폐가 바뀌어 신권을 사용 중. 어학원에 문의도 하고, 블로그를 찾아보기도 했더니 아직 호환기간이라 사용 가능하다고 했다. 아싸, 돈 벌었구나.

어쩌다보니 조카 앞으로 지불해야 할 금액과 거의 비슷했기에 손에 꼭 쥐고 차례를 기다렸다.

그런데 내가 내민 구권을 보고 공항 직원은 당황하며 옛날 돈이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달러를 내미니 다른 직원을 호출했다. 그는 내게 따라오라고 하며 세상 여유롭게 어디론가로 걸어갔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간 곳은 공항 끝자락의 환전소였다.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을텐데, 달러로 좀 받아주면 안되니? 융통성 없기는 나보다 더하구나,  당신들도.

달러를 페소로 바꾸어 다시 입국심사대로 돌아가는 길에 보니  우리 짐이 한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어느덧 공항에 붐비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우리만 남았다.


이토록 텅 빈 공항은 처음 본다. 특히나 일 처리가 빠르지 않기로 유명한 필리핀에서. 모든 외국인이 빠져나간 일방통행의 길을 되짚어 가는 나를 바라보는 필리핀 사람들.

 

훅 끼치는 바깥 냄새를 맡는다.

드디어 왔구나.

다시.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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