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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쉬는 돌 Jan 12. 2023

여행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로맨틱 영화라면 멋진 남녀가 우연히 사랑에 빠지는 장면일 테고, 스릴러 영화라면 갑자기 고장 난 차 때문에 들어간 숙소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둘인 나에게는 이런 일이 있었더랬다.


2019년, 우리 가족은 뉴질랜드로 여행을 가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다. 그날 오전에 유치원에 다녀온 둘째 아이는 배가 좀 아프다고 했다. 병원에 들르니 청진 소리는 이상 없다고 해서 안심하고 출발한 참이었다. 항공사 체크인을 하는 동안 아이는 토를 조금 했다. 그 장면을 본 항공사 직원은 이유를 물었고, 우리는 상황을 설명했다. 직원은 비행기 탑승 전에 아이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탑승 직전, 아이의 이름이 불려졌다.


우리의 변을 하자면. 아이의 상태가 심한 건 전혀 아니었다. 밤 10시 비행기라 원래 9시에 자는 아이는 졸려했고, 토를 하고 나서 저녁을 많이 못 먹은 건 사실이었다. 컨디션이 다운된 아이를 보던 지상직 승무원은 탑승을 거부했다.

"아이가 혹시 비행기에서 토를 하면 비행기가 회항해서 돌아와야 합니다. 모든 승객에게 폐를 끼치실 건 아니지요? 집에 가셔서 아이 상태를 보시고 내일 다시 출발하시죠."


안 그래도 긴 비행인데 우리 때문에 몇백 명이 돌아올 수도 있다니. 평소 남한테 피해 주는 걸 강박적으로 싫어하는 나였기에  엄청난 고민이 시작되었다. '데려갔다가 혹시나 아이 상태가 안 좋아진다면?' 하는 엄마로서의 걱정도 물론 함께였다. 선택할 시간도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 돌아가겠습니다." 눈을 끔벅끔벅하며 상황을 살피던 10살 큰 아이는 엉엉 울었다.


게이트까지 밟았던 절차를 정확히 반대로 하여 우리는 덩그러니 공항 문 밖에 서게 되었다. 이미 11시가 넘은 시간,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지친 우리들은 택시에 몸을 구겨 넣었다. 상황을 모르는 기사님이 물었다.  "여행 어디 다녀오세요?" "아.. 네.. 그냥 뭐.. 저희 좀 잘게요."


집에 돌아오고 몇 시간 후, 항공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너희들이 No Show 했으니 리턴티켓도 취소했다고. 몇 달을 준비한 우리의 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그때부터 나는 환불 가능한 숙소를 취소해야 했고, 항공사에 우리가 노쇼가 아니었다는 것을 항변해야 했고, 미리 예약했던 많은 액티비티를 취소해야 했다. 나는 이틀 만에 3킬로가 빠졌고, 아이는 다음날 멀쩡히 유치원에 등원했다. 수백만 원을 잃었고, 우리에게는 비행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리고는 코로나가 시작되어 결국 다시 출발할 수도 없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지인이 말했다, "왜 아이기 토하면 비행기가 돌아오지요? 멀미하면 토하라고 봉투까지 준비되어 있는데?"


승무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되고, 우리의 짐을 빼느라 지체하는 동안 항공사에서도 많은 돈을 지불했을 거라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과 여행을 잃게 되었다. 아이는 두고두고 말했다. 나 때문에 뉴질랜드 못 갔지, 하고.

많은 돈까지 지불하고, 우리는 남들이 잘 해보지 못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

나는 지금 시 한번 게이트 앞에 서 있다.

아이를 데리고.

무사히 저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을까?

예전엔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환상의 문처럼 보였던 저것이 마치 육중한 철문같이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내 앞에서 철컥 닫혀버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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