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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쉬는 돌 Jul 17. 2024

읽는 사람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을 고르라면 단연코, 책을 처음으로 꼽을 것이다. 아주 작은 집에 살던 어릴 때부터 책은 나의 친구였다. 내 방은 당연히 없었던 '먹고 살기 힘든 시절'임에도 엄마는 계몽사 동화전집을 사주셨다. 원래 타깃이었던 오빠는 거들떠도 안보던 그 책을 나는 닳도록 끼고 살았다. 아무도 몰랐다. 책만 펼치면 내가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을. 상상 속에서 나는 알프스 소녀도 되었다가, 다락방에서 살기도 했고, 태풍에 날려가기도 했다. 언젠가는 엄청난 부자 친부모가 나를 찾으러 오리라는 상상을 했던 것, 그날이 오면 나와 매일 싸우던 오빠에게 어떻게 복수할 지 열심히 궁리하던 것은 지금까지도 비밀이다.


글만 계속되던 책장을 넘기다가 가끔 삽화가 나오면 그건 정말 운이 나쁜 날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인물과 배경이 완벽하게 그려져 있는데, 갑자기 나온 그림은 내 상상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예쁜 그림이 아니었다. 흑백으로 '정말 어른'이 그린 것 같은 성의 없는 삽화는 나를 늘 실망시켰다. 어린 마음에도 화를 다스리며 애써 삽화를 외면하고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 상상 속 주인공의 이미지가 깨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그렇게 책의 세상에 빠져 있을 때면 엄마의 다정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또 밥 먹으면서 책 읽고 있네. 김칫국물 다 튀잖아! 밥 먹으면서 책 보지 말라고 몇 번 말하냐!!"

소위 말하는 '등짝 스매싱'은 다반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책은 나의 밥 친구였고 잠 동무였다. 얇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을 읽으면 그때만큼은 그곳이 나의 드넓은 우주였다.


여행을 좋아하는 어른으로 크고 난 후에도 가방 안에는 늘 책이 있었다. 아무리 짐이 무겁고 많아도 책 한 권은 뺄 수 없는 나의 필수 아이템이었다. 인스턴트 커피가루를 넣고 흔든 생수병 또한 마찬가지다. 커피물과 책만 있으면 전세계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풍요로운 나의 여행 메이트다. 기차를 놓쳐도, 숙소가 허름해도 괜찮다. 책을 펼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 어릴 적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을 읽던 그 안정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내 인생에서 잠깐, 책을 놓은 적이 있었다. 첫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는 인생 자체가 달라졌다. 나의 이름은 사라지고 엄마라는 역할로만 살아야 했다. 책은커녕 간단한 설명서조차도 제대로 읽을 정신이 없이 살았던 것 같다. 아이의 첫 돌이 지났을 무렵, 남편은 나에게 몇 시간의 휴식시간을 주었다. 오롯이 혼자서는 아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서도 큰 용기를 낸 제안이었다. 한몸같던 아이를 두고 향한 곳은 집 근처의 카페였다. 책장을 뒤져 예전에 즐겨 읽던 잡지를 챙겨 갔다. 마침내 향긋한 커피가 놓여지고 행복하게 책장을 넘겼는데.. 내용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를 두고 와서 마음이 급했는지, 머리가 굳어버린 건지 모르겠지만 결국 커피만 벌컥벌컥 마시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말을 시작하고부터는 함께 도서관에 갔다. 유모차 아랫부분의 수납공간에는 빌린 책이 늘 한가득이었다. 예전에 내가 읽던 계몽사 전집과는 다르게 멋진 삽화들이 가득한 요즘 동화책을 아이에게 읽어주는 시간은 정말 행복했다. 아이를 위해 읽어주었다기보다는 내가 더 신나서 읽었다. 내용이 궁금해서 내가 먼저 급하게 읽은 책도 많았다.


아이가 낮잠을 자면 그제서야 내 책을 펼쳤다. 주로 사진이 많은 여행책이었다. 결혼 전 틈만 나면 가방을 꾸려 떠돌던 나는 그럴 수 없게 된 상황에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책은 그런 나를 어느 날은 터키로, 또 어느 날은 아프리카로 데려다주었다.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책 속의 그들이 걷는 거리를 함께 걷고 있었다. 그러다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면 순식간에 '엄마'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첫 아이가 중학교에 간 지금, 나는 아주 여유로운 '읽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오전에는 도서관에 가서 한껏 여유를 부리며 책을 고를 수도 있고, 아이들이 집에 돌아와 숙제나 공부를 하는 시간에 나는 빌려온 책을 펼친다.


"치사하게 엄마만 책 읽고, 우리는 공부하는데. 나도 책 읽고 싶은데..." 하며 입을 삐죽이는 아이들은 나처럼 책을 즐긴다. 아이들이 보기에는 '맨날 책 읽고 노는 엄마'가 제일 부럽다고 한다. 책을 못 읽어 안달인 아이들과 그 앞에서 뽐내며 책을 읽는 나, 그리고 남편은 그 모습을 황당하게 지켜본다.




무거운 짐 가방에 꾸역꾸역 종이 책을 챙겨 가던 시절은 지나가고 터치 몇 번이면 수만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지만, 나는 여전히 종이책을 좋아한다. 종이 냄새와 책장을 넘기는 소리, 손가락 끝으로 남은 페이지를 가늠하며 읽는 것에는 특별한 느낌이 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책이 나의 친구로 남아주면 좋겠다. 내 아이들에게도.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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