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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쉬는 돌 Jul 24. 2024

노는 사람



둘째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왔다.

"엄마, 놀이터에서 쫌만 놀다 가자."

"음.. 오늘은 엄마가 좀 피곤한데. 집에 가서 놀자."

"엄마는 집에서 놀았잖아."

"......."

"놀자 엄마, 응?"

"엄마가 오늘 할아버지 모시고 병원 다녀와서 좀 피곤해."

"그래도 잠깐은 쉬었잖아, 놀이터 가자 엄마."

"엄마가.. 집에서 쉬고 노는 사람이지?"

"응! 우리 없을 때 엄마 노니까."

"그래, 일단 집으로 가자."


집으로 돌아온 나는 소파에 바로 누웠다. 아이는 놀이터에서 놀지 못한 속상함은 금방 잊고 집안을 누비고 다녔다.

"2호기, 엄마 쉬어야 하니까 네가 도시락 꺼내서 씻어 줘."

"어?? 응..."

아이는 작은 손으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물이 튀고 거품이 천지일 것이 분명했으나 나는 그냥 소파에 누워 있었다. 이십여 분이 지났을까? 아이는 지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엄마.. 다했어."

"그래? 그럼 건조기에 빨래가 다 됐던데 좀 꺼내 올래? 엄마는 놀아야 해서."

"응..."

설거지하는 동안 식어버린 빨래들을 통에 담아 아이는 낑낑거리며 끌고 왔다.

"가져왔어, 엄마."

"응 그래. 그럼 이제 개야지. 엄마는 좀 쉴게."


나는 핸드폰까지 손에 쥐고, 한쪽 다리는 소파 등받이에 척 올린 채로 본격적으로 쉬기 시작했다.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하는 척했지만 사실 아이가 빨래 개는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을 꾹 참고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몇 분쯤 지났을까, 아무리 해도 정리되지 않는 빨랫감과 씨름을 하던 아이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흑흑.. 엄마, 너무 힘들어요."

"그래? 그래도 어쩌니, 엄마는 쉬어야 하니까 네가 해야지."

"으앙!! 잘못했어요, 엄마가 매일 집에 있어서 쉬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 줄 몰랐어요.."

짝이 맞지 않는 양말을 손에 쥐고 아이는 대성통곡을 했다. 나는 얼른 핸드폰을 손에서 거두고 아이를 안아주었다.


"2호기, 힘들어? 엄마가 해도 힘들어. 하지만 너희와 아빠를 위해서 엄마도 집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어. 집에서 놀기만 한다고 생각하면 엄마 속상해."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엉엉"




그날 밤, 잠든 아이를 살펴보고 나와서 남편과 낮에 있었던 일을 나누었다. 집에서 가정주부로 사는 내 일을 존중해 주고 고마워해주는 좋은 사람이면서도 남편은 되려 미안해했다. 위로를 받았지만 씁쓸한 날이었다.

아이가 울며 사과했으니 내가 이겼냐 하면 그것도 아닐 터. 아이는 놀이터에 못 간 것을 금방 잊은 것처럼 오늘 울었던 이유도 쉽게 잊을 것이다. 언제나 아이와의 싸움은 그것을 계속 기억할 엄마의 패배다.


그런데 그 후부터 아이들은 조금씩 달라졌다. 밥 먹기 전에도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먹고 난 그릇도 스스로 가져다 놓았다. 알고 보니 남편이 아이들을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엄마의 고단함에 대하여, 엄마의 수고로움에 대하여. 평소에 아이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아빠가 가끔 하는 한마디는 무게감이 남다르다.


나 또한 달라졌다. 아이들이 어리다는 핑계로 과할 정도로 챙기던 것들을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원래 하던 일인데도 '굳이' 아이들에게 생색을 냈다. 아빠가 성실하게 일해서 받아오는 월급도 감사한 일임을 알려주었다. 그전까지 아빠가 퇴근해 들어와도 그저 입으로만 인사하던 아이들에게 이제부터라도 꼭 현관에 나가 맞이하자고 했다. 물론 부모로서 아이를 돌보는 데에는 최선의 애정이 담겨있지만, 너희가 당연하게 누릴 것은 아니라는 걸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가족들끼리 서로를 보듬고, 그것을 감사하는 아이들로 키우고 싶었다.




그 당시 여섯 살이었던 둘째 아이가 열한 살이 된 어느 날, 나는 아이에게 그때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 찍은 동영상도 보여주며 함께 웃었다.

"나 정말 작았네! 양말 짝도 못 찾고 귀엽다. 그런데.. 엄마 속상했겠다, 내가 그렇게 말해서."


갑자기 눈에 먼지가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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