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 안 갈 거야. 엄마랑 있을래, 엉엉"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큰 아이는 매일 아침 교문에서 버티기 일쑤였다. 겨우 달래서 교문 안쪽으로 밀어 넣고 돌아오고 나면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로부터 알림이 왔다. <책 읽어주는 어머니>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매주 수요일 아침 수업 시작 전에 동화책을 한 권씩 읽어주는 활동이라 했다. 나는 이마를 탁 쳤다. '이걸 신청하면 매주 수요일은 아이와 함께 등교를 할 수 있겠구나!'
신청을 하고 며칠 후 학교 도서실에서 사전모임이 있었다. 사서 선생님과 엄마들이 모여 읽을 책을 정하고 간단히 동화구연 연습도 했다. 평소 아이에게 하루 평균 5권 이상의 책을 읽어줬음에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책을 읽으려니 땀이 줄줄 흐르고 목소리가 떨려왔다. 모임의 이름은 책 읽어주는 어머니였으나 사실 그곳에는 할머니도 계셨다. 딸의 육아를 도와주고 있다는 그 할머니는 예전에 해보신 동화구연의 경험을 살려 동네의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싶다고 하셔서 큰 박수를 받았다. '아이가 학교 올 때 자꾸 울어서 같이 손잡고 오려고 신청했다'는 나의 작은 마음은 당분간 숨기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동화책 읽기’가 이제 7년이 되어간다. 울며 학교에 가던 아이는 중학생이 되어 졸업하고 없지만, 나는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씩 책을 읽어주러 초등학교 도서실에 간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나는 어른이 되고 아이 엄마가 되어서도 여전히 그렇다. 육아에 지치고 코로나라는 긴 터널을 지날 때에도 나는 책에 마음을 기대어 지냈다. 잠깐이라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나의 유일한 도피처가 바로 책이었다. 아이가 사회적 언어전달이 가능해지기 전부터 우리는 같이 동화책을 읽었다. 이제 내 아이는 컸지만 우리 동네 아이들이 책과 함께 자랐으면 좋겠다는 괜한 책임감이 나에게는 있다(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얼마 전에는 지인의 추천으로 ‘그림책 테라피’ 모임에 다녀왔다. 테라피스트가 그림책을 읽어주고 난 후 간단한 화두를 던지면 그 책과 연관된 감상을 서로 나누는 형식이었다. 그날의 주제는 <인간관계>였다. 테라피스트가 고른 책들이 주제와 찰떡같이 맞아서 한 번 놀라고, 같은 책을 읽었음에도 저마다의 대상을 떠올리며 다른 생각을 펼쳐나가는 것에 한 번 더 놀랐다. 책이 가득한 정돈된 공간에서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책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렇게나 즐겁다니. 그리고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책이 내가 스스로 읽는 것보다 몇 배나 재미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남이 읽어주는 책을 듣고 있으니 지금까지 내가 읽어주었던 책들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어렸기도 했지만, 나는 성대모사 비슷한 것을 해가며 과장되게 읽어주었다. 등장인물, 사물의 목소리를 다 다르게 표현했다. 공룡책을 읽고 나면 목에 무리가 가서 다음번에 아이가 같은 책을 골라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나였기에 ‘전문가는 얼마나 재미있게 읽어주는지 봐야지’하는 옹졸한 마음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녀는 한결같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낭독을 끝냈다. 당황스러웠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내가 어색한 연기를 하는 것보다 훨씬 듣기 좋았다는 것을 인정하고야 말았다. 일정한 톤으로 읽어주니 ‘그림에 집중해 달라’는 그녀의 부탁이 무색하게 그림책에 빠져들었다.
물론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요란스러운 엄마의 책 읽기가 재미있었을 거라고 믿는다(그렇다고 해줘 얘들아). 이제는 그런 시기가 지나가고, 아이들도 더 이상 책을 가지고 와서 읽어달라 하지 않으니 아쉽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림책 테라피스트가 자분자분 책을 읽어주는 걸 듣고 있노라니 이런 세련된 방식이라면 지금도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볼 수 있겠구나, 싶어 무릎을 쳤다. 이래서 친정엄마가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고 했구나.
또 한 가지 질투가 날 만큼 부러운 것이 있었으니, 바로 공간이었다. 오래된 작은 골목에 자리 잡은 <안녕 서재>라는 그곳은 열 평 남짓한 곳곳이 책으로 꾸며져 있는데, 모든 것이 과하거나 모자람 없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결이 비슷한 사람과 책들을 작정하고 수집하려는 듯 주인장의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서재였는데, 문제는 내가 이미 읽었고 호감을 느낀 책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취향이 한껏 묻어나는 책들을 자신 있게 모아 놓으려면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을까 싶다. 결국은 그 진정성이 가장 부럽다. 부러우니 이미 졌다.
다행히도 그곳은 ‘공유 서재’이다. 원한다면 나도 마음껏 그곳을 내 서재처럼 이용할 수 있다. 우선은 가끔 그런 곳을 찾아가 즐기면서 염탐(!)을 하려고 한다. 언젠가 내 서재가 생길 그날을 기다리며, 그리고 더 나은 ‘읽어주는 사람’이 될 그날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