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미, 소박한 아름다움을 담은 우리 공예미의 정수
2부. 한국 미술에 나타난 자연미(3)_조선 분청사기
15세기부터는 청자에 이어 분청이 제작됩니다. 분청은 청자에 화장토로 분을 바른 것입니다.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자 고유섭은 고려청자 도요지 발굴 조사를 하다 토기, 고려청자, 조선백자와는 생김새와 미감이 다른 기물이 섞여 나오는 것을 모아두었다가 분청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로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회흑색 태토(회청)에 백토로 마무리한(분장) 사기라는 뜻입니다. 표면을 백토로 분장하고 푸른색 맑은 유약이 살포시 흐르는 도자기를 보노라면 마치 얼굴에 분을 곱게 바른 여인의 모습을 보는 듯하기도 합니다.
사실 겉모양은 다른 듯해도 청자와 분청의 재료와 성분은 같습니다. 청자가 지배층들의 미감과 정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데 집중하였고 관리 속에서 제작된 것이라면, 분청은 영남, 호남, 충청권 민요(民窯)에서 주로 제작되었습니다. 고려 말 상감청자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고급품과 저급품이 동시에 대량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조질 청자에는 어떤 규율이나 제약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도공의 손에 익은 대로 자기를 빚는 솔직하고 대범한 표현이 주를 이룹니다. 이것이야 말로 분청사기의 매력입니다.
분청은 지배층들의 상징물이 아닌 왕가나 서민을 아울러 생활 속에서 사용하기 위한 일상용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저 만드는 사람도 편안하고 사용하는 사람도 편하게 사용하니 형태도 자연스럽고 꾸밈이 없으며 문양도 수더분하기 그지없습니다. 마치 돋보이거나 잘 보여야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는 소탈한 사람을 만나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조선 왕실의 백자 애호가 증가하면서, 분청은 서서히 민간의 그릇으로 지방색을 강하게 띄며 발전해갑니다.
분청의 제작기간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약 150여 년에 불과합니다. 무척 짧게 제작되었다가 사라진 기물입니다. 그러나 어느 기물보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표현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민예운동가들을 비롯해 미술사가들의 많은 애호를 받았습니다. 분청사기에는 고려청자의 화려함이나 조선백자의 고매함과는 다른 자연스러움과 자유분방함, 소박함 등의 미감이 있습니다. 조선 달항아리와 더불어 한국 미술의 격식 없는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을 상징하는 공예미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청은 청자나 백자와 달리 주로 지방 민요(民窯)에서 제작했기에 관요의 간섭과 격식을 벗어난 자유로움과 창조적 조형미, 다양성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영남지역에서는 주로 왕실이나 관공서에서 사용할 공납용 기물이 주로 제작되었습니다. 기법으로는 인화, 상감이 주를 이뤘습니다. 인화문은 일종의 도장입니다. 인화를 수분을 머금은 기물 표면에 간격과 압력을 일정하게 조절해가며 시문 합니다. 촘촘하고 일정하게 문양을 시문하여 장식한 탓에 호남 분청이나 충북 계룡산 분청과는 다른 흐트러지지 않는 면모, 은율미, 정갈한 멋이 한껏 느껴집니다. 마치 도포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영남 선비의 꼿꼿함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호남은 붓을 사용하거나 백토물에 덤벙 담가 장식하는 귀얄과 덤벙 분청이 유행했다. ‘아름답다’는 표현보다는 ‘멋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귀얄, 덤벙, 철화같은 영남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표현입니다. 격식과 규율보다는 도공의 자연스러운 표현을 허용한 제작이 허용되기 시작한 것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분청의 제작지가 옮겨 오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얄;은 붓에 백토물을 묻혀 빠르게 몸체를 휘돌린 기법입니다. '덤벙'은 말 그대로 백토물에 그릇을 덤벙 담가 꺼낸 것이지요. 이때 덤벙이나 귀얄은 기물의 바닥 끝까지 백토물을 묻히지 않습니다. 백토물은 유약과 달라 세월이나 사용감에 의해 자주 바닥에 쓸리고 겹쳐 보관하면서 표면에서 쉬이 탈락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귀얄과 덤벙 분청에는 태토의 거친 질감과 어두운 밑색이 화장토 바른 백색과 속도감과 대비되며 묘한 어울림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분청을 보고 법정스님께서는 ‘바람처럼 물처럼’ 자유로운 선(禪)의 세계를 닮았다 하셨습니다. 뽀얀 하얀 흙물 머금은 붓 한번 쉬이 돌린 듯, 그저 그릇 한번 흙물에 덤벙 꺼낸 듯 자유로운 표현, 청자의 차가움에 비해 따뜻한 채도의 분청 색의 스펙트럼-아이보리빛, 다갈색, 잿빛 등은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여기에 백토물 바른 위에 뾰족한 나뭇가지 끝으로 혹은 산화철 안료 묻힌 붓으로 물고기, 모란, 연꽃등을 그리면 바탕의 귀얄 붓의 속도와 어울려 마치 그 안에 물고기가 유영하는 듯, 모란이나 연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그 문양의 그림이 마치 현대 추상회화 같기도 하고 사실적인 것 같기도 합니다. 철물을 묻혀 그리는 철화분청은 계룡산을 위시로 한 충청도에서는 주로 제작되었습니다. 검붉은 철물(鐵彩)로 자유롭게 그린 물고기의 해학과 익살이 즐겁습니다. 인화, 상감, 귀얄, 덤벙, 철화 할 것 없이 옛 분청의 표현은 어질고 착하고 순정적인 조형 감각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현대 미술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현대적 감각, 조형미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민예운동가들을 비롯해 한국 미술사가들이 청자, 백자를 두고 분청에 주목하고 그것이 지닌 미감을 칭송한 것은 분청 안에 한국 미술이 모두 성취하고 싶은 그것, 바로 '자연미'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옛 도공이 만든 분청에는 억지로 무엇을 잘 그리겠다, 잘 만들겠다는 인간의 인위가 없습니다. 욕심 없으나 솜씨가 수려한 물건을 볼 때 우리는 ‘자유로움’을 떠올립니다.‘자유로움’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현대인들은 항상 이유모를 속도와 압박에 시달립니다. 스스로를 자유롭지 못한 존재로 여깁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현대 예술은 끊임없이 예술을 통해 자유로움을 갈구해왔습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멋스러우며, 청자 같은 좌우대칭의 완벽한 이상향을 담고 있지 않지만 분청사기는 고려 시대 청자에 지배층들이 투영하고자 했던 엄격한 비례의 미를 벗어나 자유분방하고 자연스러운 물질성과 멋으로 대체합니다. 이웃 나라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분청사기를 가지고 가서 선불교의 정신과 연관시켜 상품(上品) 보다 하품(下品)에 더 무게를 두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민예품의 표본’으로 대접했습니다. 이러한 옛 분청이 지닌 아름다움을 현대 예술가들이 애호하고 자신의 창작에도 담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은 3부에서 다시 현대 작가들이 옛 분청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빼내 우리 시대의 새로운 표현으로 성취하고 이루었지에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