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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수 Aug 29. 2022

우리 공예에 나타난 자연_고려 청자

고려청자에 나타난 자연미의 추구

2부. 한국 미술에 나타난 자연미(2)_고려 청자



빗살무늬토기, 신석기 시기,  서울 암사동 출토, 높이 50.2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장에서는 한국인의 자연 인식이 어떻게 우리 문화유산 공예에 반영되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양한 한국의 문화유산 중에서 현재 많은 수가 남아있는 유물은 단연코 도자기입니다. 박물관을 찾아 전시실을 둘러보면, 선사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많은 도자기 유물과 그릇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흔하디 흔한 것이 도자기라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자기를 잘 모르고서 우리의 문화, 한국민의 생각과 태도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자기만이 중요한 문화유산이라서가 아닙니다. 일단 각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 중에 도자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제일 높고, 상대적으로 불교 조각이나 회화는 수가 적습니다. 또한 도자는 매일 생활 속에서 부귀나 신분의 고저와 상관없이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물건이었습니다.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 토기 역시 농사 후 잉여 생산물을 보관하거나 화덕에 음식을 만드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도자기는 유구한 시대 별 문화를 알려주는 문화유산입니다.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로부터 청동기 시대에는 흙을 마연한 덧무늬토기가 있었습니다.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서도 도자기는 범대중들의 일상용품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청자가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는 분청이, 조선에는 백자가 시대를 대표하였습니다. 이러한 예들은 한국인이 이 땅에 삶을 영위하면서 매일 반드시 그릇을 사용해야 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지배층과 피지배층, 용도에 따라 도자의 질적인 차이가 있었지만 그릇 없이 누구도 생활이 불가능했으리라는 것을 시대를 대표하는 여러 유물들이 말해줍니다. 즉, 박물관의 도자기들은 한낱 그릇이 아니라 각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양태를 가늠하게 해주는 것이며, 사람들이 무엇을 중시하고 염원하였는지 알게 해 줍니다. 곧 도자기는 당시의 문화를 읽게 해주는 좋은 지표이자 한국인의 삶의 발자취를 그대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도자기를 통해 한국인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미의 실체와 흐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민예품, 특히 도자기를 애호하고 수집했던 일본인 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앞서 한국미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논의를 소개해드렸습니다. 이들이 한국미를 규명하고 정의하기 위해 논했던 유물 중에 가장 많이 회자된 것 역시 '도자기'입니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1942년 발표한 「고려와 이조」에서 글의 첫머리에 “일찍부터 중국에서까지 고려의 이름은 높았다.…그 명성이 이미 고전적인 것이었다”라고 하면서 “고려의 강점은 무엇보다도 청자의 색조에 있다.… 어떻게 해도 모방되지 않는 것이 고려의 비색(翡色)이다. 참으로 ‘비색’이라 불릴 만큼 독자적인 것이어서 위조품으로 성공한 예가 없다. 이처럼 고려청자는 고려시대의 명품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계의 도자기 중에서 독자적 존재를 지니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의 서긍이 『수중금(袖中錦)』속에서 ‘고려 비색이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고 칭송했던 청자의 비색은 당시 옥(玉)을 애호하던 문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서긍이 “고려에서는 이러한 청자를 무엇이라고 부르는가?”라고 물었더니 “비취翡翠 옥을 닮아 비색(翡色)이라 부른다”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옥에서 신비한 기운이 나온다고 여겼습니다. 이 이유로 중국의 왕족들이나 귀족들은 옥으로 만든 다완에 차를 마시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옥으로 만든 완은 너무나 비쌌기 때문에 이를 대신하여 당시 중국 저장성에서 만든 다완이 청자였습니다. 월주요에서 푸른 옥을 모방한 청자 다완을 만들자 사람들은 이 청자 다완에서도 신비스러운 효과를 느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차는 오래전부터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한다고 여겨왔습니다. 이를 옥빛을 닮은 다완이 자연과 인간이 일체화되는데 더 도움을 준다고 믿었던 것이죠.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차와 찻잔이 전래된 시기는 9세기입니다. 820~830년대 유학 갔던 신라의 승려들이나 유학생들, 당나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이를 가져왔습니다. 




고려는 불교 중심의 국가이지만 문화 이데올로기로서 유교를 강조했습니다. 다례가 중요한 정치행사였을 만큼 차는 고려시대에서 중요한 역할과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주전자나 찻잔이 중요한 유물입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상형 그릇들이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참외를 닮은 꽃병이나 조롱박형 주전자, 연잎이 에워싼 그릇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부분 자연물의 형상을 기형이나 장식으로 응용하여 만든 것입니다. 장식에도 자연물이 무늬로 자주 등장합니다. 12세기 고려청자에는 주로 부귀를 상징하여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모란무늬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고려인들이 가장 선호한 무늬는 학과 구름입니다. 12세기 고려에는 도교사상이 널리 유행하면서 장수와 영혼의 운송수단으로 학을 자주 공예품의 무늬로 시문하였습니다. 하늘세계를 상징하는 학은 길상적 의미를 닮은 구름과 어울려 등장합니다. 이는 영원한 세계 즉 자연의 이상적 세계를 동경하는 고려인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고려청자 중에는 상상의 동물도 많이 등장합니다. 지금 보시는 어룡형 주전자는 머리를 용인데 몸은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상상력이 매우 뛰어나 보입니다. 이처럼 자연을 이상 세계로 여기는 고려인들의 자연관에는 도교적 색채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청자사자유개향로(靑磁獅子鈕蓋香爐). 국보 제60호 (左) 청자비룡형주전자(靑瓷飛龍形注子) 12세기(右), ⓒ국립중앙박물관



13세기 무신정권이 고려사회의 지배층으로 등장하면서 자주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고려청자에도 영향을 줍니다. 중국풍의 공예의장화된 무늬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구성한 회화 무늬가 주를 이룹니다. 여기에서도 연못, 버드나무, 오리 등 자연 풍경이 주를 이룹니다. 12세기 청자가 맑고 조용한 이상 세계의 아름다움을 구현했다면 13-14세기에 전개된 상감청자는 보다 현실세계의 모습과 닮아있습니다. 특히 이 시기 청자에는 유려한 곡선을 강조하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이 시기 청자 기형은 같은 시기 중국 청자에서 볼 수 없는 기형이 많습니다.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한국 미감이 13세기 청자에 반영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지금 보시는 <청자상감포류수금문도판>은 고려 13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마치 청자도판을 챙겨 들고 가을날 강변에 나가 스케치한 듯한 정경 묘사를 보여줍니다. 화면 아래쪽에는 갈대밭을 그려 넣고 그 사이에는 분주하여 수면 위를 오가는 물새들의 다양한 자태를 묘사한 작품입니다. 당시 고려인들에게 강가나 연못가에 여유롭게 가지를 드리운 수양버들과 수면을 가르고 헤엄치는 물새 풍경은 세상의 번뇌가 모두 다 사라진 이상향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물과 하늘의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물새들은 물 위에 떠 있는 걸까요 아니면 하늘 위에서 노니는 걸까요? 여백은 물이 되기도 하고 뭍이 되기도 하며 하늘이 되기도 합니다. 만약 서양의 화가가 물새가 노니는 물가 풍경을 그렸다면 어떠했을까요? 서양의 화법은 먼저 하늘과 물의 경계-수평선 혹은 하늘과 땅의 경계-지평선을 그려 화면을 나누는 것부터 시작했을 겁니다. 여기서 자연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 인간의 시선이 정해지죠. 그에 따라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계산된 원근법이 동원되어 가까운 것과 멀리 있는 것을 크고 작게 비율에 따라 그려 넣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화에서 이러한 이런 구분은 필요 없습니다. 도판의 넓은 여백은 어떤 구분의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하늘도 되었다가 물도 되었다 하는 것이며 그 안에 오로지 고정된 나의 시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자연과의 합일, 도(道)의 관계망 속에 일체화된 미물들이 관계 짓는 온전한 세계가 눈에 보이시나요?

청자상감위로수금문도판(靑磁象嵌 葦芦水禽文 陶板),  고려(高麗時代) 12세기, 너비 20.5 ×15.9cm ⓒ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


13세기 고려사회에 유행했던 도교사상은 이전가지 정치사회의 중심 이데올로기였던 유학사상과는 구분됩니다. 13세기 고려 문집에는 인위적인 것을 피하고 자연에 회귀하여 순리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선비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최자의『보한집』, 이인로의 『파한집』등에는 이러한 자연에의 동경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청자에 유행했던 무늬 중에서는 소박하고 작은 들국화가 유독 많습니다. 국화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도연명이 야생화가 잔뜩 핀 시골길을 맨발로 걸으며 즐거움을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이야 말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진정한 삶의 모습이라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들국화는 자연에 귀의(歸依)하려는 마음이요 자연합일(自然合一)의 의미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자연에 은일(隱逸)하고자 하는 고려인들의 마음이 청자에 들국화를 시문하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12세기에 이어 13세기에도 운학 무늬는 자주 등장합니다. 주로 창공을 나는 모습으로 학을 표현하였습니다. 도교에서 학은 신선을 태우고 선계를 나는 영물입니다. 운학문을 당시 고려사회에 유행하던 불교의 측면에서 해석하면, 구름과 학이 노니는 세계는 괴로움이 없는 이상 세계 바로 정토(淨土)입니다. 무신정변 이후 선종 중심의 혁신운동이 시작된 새로운 움직임 즉 새로운 불교가 도달하고자 했던 참된 세계가 운학 무늬에 담겨있습니다.     


고려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高麗靑磁 象嵌雲鶴紋 梅甁)      12세기 중엽,   높이 42.1cm, 몸통지름 24.5cm   ⓒ 간송미술관
고려시대 사람들의 현실 세계 도피와 이상 세계에 대한 염원이 투영된 고려 시대 상감 운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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