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나 지금이나 오랜 옛날부터 동아시아인들 아니 우리 조상들은 생명의 본성, 자연의 이치, 삶의 이치를 자연을 통해 깨달아왔습니다. 겸허한 태도로 자연과 교호 한다든지, 자연에 존재는 모든 것들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마음 등이 그것입니다. 나의 존재를 앞세우기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서로 유기적 관련 속에서 진정한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견해는 단순히 자연으로부터 의식주를 취하고 경작하는 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에는 자기애와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자연 안에서 만물이 관계의 그물 안에서 보면 아주 작은 미물에 불과하다는 점, 결국 관계의 그물 안에서 모든 만물은 평등하며 제 몫을 다하며 공생하는 관계라는 점을 인정하기 위해선 자신의 정신력을 드높이는 내면화 작업을 일상화해야 합니다. 노자가 언급한 무위(無爲)가 그렇고 불교에서 중시하는 수행 역시 이러한 데서 파생한 것입니다.
나를 자연의 일부 내지 일체로 인식하는 관점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 한국문화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해온 불교 사유 속에도 잘 녹아있습니다. 불교 경전에는 “모든 흙과 물은 다 나의 옛 몸이고 모든 불과 바람은 다 나의 진실한 본체이다”라는 말이 그러합니다. 불교는‘내 것’에 대한 연기적 이해를 제시하면서 결국 ‘내 것’이라는 것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변화하는 존재이며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죠. 즉, 나의 욕망을 확장하는 것은 남의 욕망과 부딪히는 사건을 만드는 것이며 결국 나는 그러한 사건의 발단을 최소화 내지 무화시키는 것 인식의 틀 위에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땅과 바다의 모든 흙과 물은 다 나의 옛 몸이고 모든 불과 바람은 다 나의 진실한 본체이니 항상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아끼고 보호해야 한다."
- 범방명 梵網經 중에서
“땅과 바다의 모든 흙과동양인들은 자연이 거대한 연속체라는 생각과 함께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기가 존재하고 기가 이 둘의 사이를 매개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대자연의 일부요. 자연과 인간 간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합일(合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무엇보다 노장사상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노자는 인간의 주관성을 내려놓고 자연의 객관성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장자는 한 걸음 나아가 그러한 자연의 객관성을 다시 자신 안으로 주관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장자는 정신을 해체하여 자연에 몰입하는 노자의 방식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객관성을 인간 정신의 자기 충족으로 이끌려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소요의 정신’입니다. 즉, 장자는 “시간의 변화에 안존하고 자연의 순리에 따른다면 슬픔과 즐거움이 마음에 파고들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장자는 지극한 즐거움인 지락(至樂)을 자연과 함께하는 즐거움인 천락(天樂)에서 본 것이죠.
결국 노자든 장자든 동양의 전통적 우주관은 곧 모든 존재가 ‘존재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가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데 동의합니다. 모든 생명은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 생명의 온전한 발현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모든 생명과 연합된 하나의 생명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인간은 그저 자연을 바라만 보는 존재만은 아닙니다. ‘내’가 자연을 일방적으로 감상하거나 자연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변화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연에 군림하는 것 아니라 만물의 유기성 안에서 우주의 법칙에 따라 유기적 인간의 본래 모습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미술 또한 그러한 변형의 역할 속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