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병(白磁甁), 조선, 높이 36.5cm, 단정함과 기품이 느껴지는 유연한 형태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의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한국민의 심성을 잘 대변하는 기물로 조선 백자를 우선하여 꼽는 이가 제법 많습니다. 조선백자는 고려 말 무신 사회의 풍기문란과 사치를 비판하고 검소, 검박, 절제를 중시하며 성리학적 사고를 시대 이념으로 삼아 새로운 유교 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조선 지배층들의 이상향이 깃들어 잇습니다. 고려와는 다른 차별화와 명분을 얻고자 그리고 중국에서 유행했던 청화백자를 왕실의 상징 기물로 소유하고자 조선 왕실이 정책적으로 제작 가이드라인을 주고 관리, 감독하여 제작한 기물입니다. 왕실 이외에 사사로이 제작하거나 소유하는 것을 법령으로 엄격히 금하고, 힘 있는 왕실 가족 혹은 고위 관료를 관리 총책임자로 임명해 관리를 맡길 만큼 아무리 양반일지라도 사사로이 사용하거나 유통하는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왕실이나 관리들이나 구분할 것 없이 청빈한 군자상을 내세워 평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차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을 강조했던 탓에, 백자는 마음의 청정(淸淨)을 희구했던 선비들의 자부심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문양과 기형을 제작하였으나 점차 중국과 달리 여백이 많고 간결하며 소박한 회화가 제작되었습니다. 특히 18세기에 제작된 달항아리는 수많은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눈같이 흰 것을 사랑하는 조선인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좌우대칭이 안 된 후덕하고 원만한 비대칭의 선형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느긋함을 느끼게 합니다.
조선 선비들이 충효, 기개의 상징으로 여겼던 동정추뤌, 대나무, 매화 등의 도안이 전문도공의 대담하고 수려한 필치로 그려졌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과 그 예술>에서 “동서를 막론하고 시대가 내려오면 기교가 복잡도를 더한다… 그런데도 실로 흥미 깊은 예외를 조선의 도자기 공예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아름다움은 단순으로의 복귀다.… 자연에 대한 신뢰야말로 조선 말기 예술의 놀라운 예외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 일본 도예가 하마다 쇼지와 함께 민예운동을 이끌었던 영국 도예가이자 민예 운동가인 버나드 리치(Bernard Howell Leach, 1887~1979) 역시 미국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현대인이 추구해야 할 미의 세계는 조선의 백자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1935년 귀국 시 달항아리를 구입하며 “행복을 안고 간다”라고 표현했을 만큼 조선백자에 관한 애정이 두터웠습니다.
버나드 리치(Bernard Howell Leach)가 애호하고 소장했던 달항아리, 현재 영국 대영박물관 소장품이다.
본래 백자 달 항아리의 이름은 '백자대호'입니다. 어지간히 크고 둥근 크기의 항이리를 무동력(無動力) 전통 목물레로는 만들기가 어렵습니다.아랫부분이 굳지 않은 상태에서 윗부분을 둥글게 만들면 흙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건조과정이나 불 속에서 풀썩 주저앉기 일쑤입니다. 옛날에는 장작을 연료로 야외 지형 각도를이용해 지은 오름 가마를 사용해 오랜 시간 불을 때었기 때문에 온도를 높이기도 안정적으로 불을 조절하기도 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박물관,개인소장자 구분할 것없이 높이 50cm 전후 잘 생긴달 항아리를 보는 것이 어렵습니다.
항아리는 동서양 두루 제작되었지만, 서양의 항아리들은 대부분 어깨가 풍만하고 허리가 홀쭉한 이른바 장호(長壺) 형태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18세기 보름달처럼 넉넉한 느낌의 둥근 항아리를 만들고자 했던 조선의 도공들은 기술상의 어려움과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가 지금 보는 달항아리, 하얗고 크고 선이 유려한 멋진 항아리를 만들었습니다. 이를 위해 도공들을 커다란 대접 두 개를 만들고 그것을 위아래로 이어 붙이는 특별한 방법을 고안해내었습니다. 이 제작 과정 상 특징 때문에 모든 달 항아리는 필연적으로 가운데 부분을 이어 붙인 자국이 남아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기에 동일한 발(鉢)을 만들기란 불가능합니다. 각 발의 회전 방향, 일종의 나이테. 결도 뒤집으니 반대입니다. 결국 형태가 완전한 대칭의 구형(求刑)이 아니라 비대칭의 둥그스름한 모습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제작상의 특징 때문에 달 항아리는 인간적인 체취가 살아있는 너그러운 형태와 어질고 친숙한 선을 지닌 특유의 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훗날 예술가와 문인들이 수없이 칭송한 바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미술사가 최순우(崔淳雨, 1916-1984)입니다. 그는 평소에도 '달항아리는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 자주 말했습니다. 그는 백자 항아리의 희고 깨끗한 살결과 둥글둥글한 생김새가 보름달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달항아리’로 명명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백자 항아리를 부녀자에게 빗대어 표현함으로써 풍만한 넉넉함과 백색을 우리 문화의 풍토성과 우리 민(民)의 정서와 연관 지어 설명하고도 있습니다.
백자대호(白磁大壺, 달 항아리), 조선, 높이 43.8cm, 국보 제310호 Ⓒ국립중앙박물관
현대인이 추구해야 할 미의 세계는 조선의 백자다” by Bernard Leach (1887-1979)
달 항아리는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최순우, 《한국미술사》중에서
미술사가 이동주는 『한국회화사론』에서 달항아리의 미를 “화려 호사한 고려의 귀족 취미에 반하여 조선 양반들은 질박하고 소박하며 단순한 무장식(無裝飾)의 순백자 취미를 내놓았다. 소박한 순백자는 달항아리 같은 설백(雪白)의 큰 항아리에 이르면 말할 수 없는 호화감(豪華感)을 일으킨다... 이는 철저한 유교주의가 서민과 부녀자의 전통감(傳統感)과 마주쳤을 경우에 생기는 일종의 소박하고 화사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된다.”라고 평했습니다.
달항아리로 대표되는 재료의 근본과 과정을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한국미술의 특징에 대하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그것을‘고졸미(古拙美)라고 하였습니다.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마음을 비우는 제작자의 태도가 만든 것입니다. 분청사기의 꾸밈없는 자태나 소색(消色) 으로 충분한 달항아리는 비워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한국인 특유의 비움의 미학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욕심이 없어서 천하가 풍족해지고, 인위가 없어서 만물이 조화된다." (无欲而天下足, 无爲而萬物化) - 장자(외편), 제12편 천지
장자의 경구처럼 공예가들은 자연의 재료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그 성질에 맞추어 오직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깨어있는 정신 아래 단련시켜 욕심 없이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아름다운 한국미술을 제작한 모든 공예가들의 기본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