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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수 Aug 30. 2022

옛 분청의 다채로움과 일상성

자연 애호 그리고 인간의 삶과 생의 필요로부터 길어 올린 소박미(素朴美)

3부_현대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는 우리 '분청'의 세계



앞서 2부에서 설명드렸듯, 분청은 일반적으로 서민의 그릇으로써 소박함, 실용성, 격식 없는 자유로움을 대표하는 한국미의 상징으로 회자되곤 합니다. 그러나 분청을 ‘서민의 그릇’으로 한정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반박의 예로 분청 중에서도 인화분청사기(印花粉靑沙器)는 요즘 조달청에 해당하는 장흥고(長興庫)의 지시로 공납한 물건입니다. 이는 조선 초 국가에서 직접 가마를 운영하는 대신 지방에서 제작하여 세금 대신 납품된 물건으로 개인이 사사로이 주문하거나 쓸 수 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 화면에서 보이는 항아리는 조선 초에 제작되어 왕실에서 사용되었던 태항아리(胎壺)입니다. 왕가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잘 씻어 미리 점지해놓은 길방(吉方)에 안치하여 두었다가 길일을 정해 보관해두었던 태를 태항아리에 넣어 잘 밀봉한 후 묻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태항아리뿐 아니라 이처럼 인화, 상감기법으로 만든 분청은 1400년대 후반 백자가 본격적으로 조선의 국도(國陶)가 되기 전까지 지배층의 고급 일상품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장흥고」명 분청사기 인화문 대접 (「長興庫」 名粉靑沙器印花大鉢) 조선 15세기 ⓒ국립중앙박물관



분청사기상감초화문태호 (粉靑沙器象嵌草花紋胎壺) 조선 15세기, 세종의 장녀 정소공주(貞昭公主)의 묘에서 출토


주로 지방에서 제작되던 분청은 청자나 백자에 비해 다양한 기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분청사기의 생산 방식은 고려 말 무신 사회의 자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중앙의 관리와 요구로 만들어졌던 청자나 관요 체계 속에서 제작 관리가 이루어졌던 백자와는 다릅니다. 분청은 민요(民窯)에서 제작되었습니다. 덕분에 분청은 지역의 문화, 지형적 특징에 부합하는 형태, 문양을 반영하고 있으며, 약 200여 년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표현이 지역별로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영남지역에서는 주로 인화, 상감 분청이 발전했습니다. 여기에는 귀얄, 덤벙, 선각이나 박지 기법과는 다른 상당히 어떤 규격과 룰을 지킴으로써 비롯된 단정하고 정갈한 멋이 있습니다. 인화, 상감기법을 촘촘하게 시문하여 흐트러지지 않는 면모를 보여줍니다. 반면 시문된 문양을 살짝 덮은 유면은 약간의 푸르름을 머금고 있어 청연 하고 경쾌한 멋을 감지하게 합니다. 이것은 백자 표면에 옅은 푸른 끼가 도는 투명유가 시유된 것과는 다른 것으로 분청 특유의 환원된 잿빛 태토와 아이보리색 화장토와 함께 어울리면서 색온도와 질감 차이에 따른 대조미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화와 상감 분청은 조선시대 여당의 세력과 학문의 중추적 역할을 한 유학의 큰 근거지로서 영남의 지역색이 반영된 면도 없지 않습니다. 법도와 충효를 바탕으로 한 엄격한 유교문화를 통해 국가의 권위의 옹립을 추구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뚜렷한 주체의식과 강직한 학자적 소양을 중시하는 영남 선비문화의 특색이 인화, 상감과 같은 규칙성이 강조된 단정한 표현을 가능하게 한 것이라고 봅니다. 



반면 호남은 삼국시대부터 일찍이 주도와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정치, 학문적 중심지에서는 벗어났지만 예술, 문화면에서 타지방을 앞서가는 우월함이 있어왔습니다. 특히 호남지역은 고려시대부터 선종이 송광사에서 나올 만큼 선종의 자유분방함이 깃든 지역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호남의 문화는 ‘룰’에 얽매이기보다 자유분방한 것, 새로운 문화욕구에 앞서 나가는 혁신성 등이 도드라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음악을 보아도 영남권에 가까운 동편제(운봉·남원·구례·곡성 등의 섬진강 동쪽 지역에서 발달한 소리)는 잔 기교보다는 통성을 쓰며 소리 끝을 여운 없이 짧게 끊는 대마디 대장단의 특징이 있지만, 호남의 육자배기나 서편제는 억양이 강하고 구성진 멋이 있으며 애절하고 기교적입니다. 붙임새도 다양하고 소리의 꼬리도 길어져서 동편제 소리와는 훨씬 다른 아기자기한 맛이 있습니다. 따라서 호남 분청에도 상당히 율동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며 리드미컬한 표현이 두드러지는 것은 한 지역이 배태한 문화가 갖는 당연한 특색일 것입니다. 부드러운 선에 적절한 힘을 불어넣어 선 하나하나마다 활력과 율동성, 속도감, 운동감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힘을 주어 과격하게 붓과 도구를 놀리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기술과 실기 지식을 체화, 단련시킨 숙련된 제작자가 자신의 심미안을 발휘하여 응용, 변용하여 만들어낸 능숙한 경지의 표현입니다.    

  


분청 제작의 또 다른 축인 충청도는 계룡산을 거점으로 독자적 표현을 이룹니다. 제도권과 가까운 이유로 인화, 귀얄도 제작되었습니다. 호남 등에 널리 사용되었던 조화, 박지기법이 드문 대신 철화기법(鐵彩)이 나옵니다. 이는 충청권이 영남, 호남과 다른 독자적 문화색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분청의 다채로운 표현은 신분고저에 크게 상관없이 일상기로서 사람의 삶과 밀접하게 사용된 공예품이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자고, 입기에 필요한 것에 귀 기울이고 소임을 맞춰야 하는 것이 공예이고 자신의 재기나 아이디어보다 정작 공예품을 사용할 사람들이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에 맞추어 형태, 질감, 문양 등을 넣는 것이 공예품 제작의 정도이자 척도임을 옛 분청의 다채로움은 보여줍니다. 삶이, 인간의 소소한 바람과 열망이 고스란히 그릇의 형태로 담기고 자연을 닮고 가까이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생각이 유독 분청에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담긴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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