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분청과 현대 예술(1)
3부_현대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는 우리 '분청'의 세계
[ 3부의 작은 문을 여는 글]
앞서 1부와 2부에서는 우리 미술이 자연을 인간의 의지, 인위(人爲) 보다 중시해왔고, 무엇을 만들고 세우든 자연을 닮은 것을 만들고자 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미술, 그중에서도 신석기시대부터 조선 백자에 이르기까지 제작된 도자기 속에서 그것을 확인해보기도 하였습니다.
3부에서 저는 조금 더 깊고, 범위를 좁혀 ‘분청’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한국의 작가들이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어떻게 우리 전통, 그중에서도 옛 분청에서 무엇을 보았고 그것을 각자 다르게 읽으려 했던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오늘 우리 작가들이 도자 전통으로부터 착안해 새롭게 만드는 예술 표현을 읽으려면, 먼저 우리 분청이 어떤 미적 특질과 아름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그리고 급속한 성장 위주의 사회경제발전을 추구해왔던 대한민국. 우리의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무너진 것을 추스르기도 전에 1960년대 정부가 일본을 개시로 문호를 개방한 이후부터 빠르게 새로운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당시에는 인터넷도, 외국으로부터 서적을 들여오거나 교류하는 일도 여의치 않았지만, 1980년대 이후 대학에서 많은 작가들이 육성되고 점차 외국과의 교류, 유학 등을 경험한 젊은 작가들이 늘었습니다. 서구로부터 영감을 받은 새롭고 실험적인 표현을 시도하며 서구 현대미술에 준하는 경지에 다가가려 무던히 애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작가들의 노력과 달리 하면 할수록 서구 미술의 것과 닮은 것만이 나오고, 작가들 스스로 그 안에 한국의 정체성, 경쟁력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대안을 찾고자 무구(巫具), 민화 같은 우리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기도 했고, 박물관에 소장된 빗살무늬토기나, 백자대호, 분청 찻사발 등을 소재로 작업하며 그 속에서 한국적인 것, 한국민으로서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전후로 해외로부터 우리 미술에 대한 정보가 전시와 출판물 등의 형태도 알려졌습니다. 해외의 반응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뜨거웠습니다. 언론, 인터넷 환경이 좋아지면서, 손쉽게 이러한 소식이 국내에 속히 알려졌습니다. 물론 1950년대부터 일제강점기 수탈과 한국전쟁으로부터 중단된 전통의 맥락을 되살리고 새롭게 산업, 예술로 진척시켜보려는 자성 노력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950년대 정부 혹은 민간주도 연구소에서 일하던 도예가들이 경기도 일대 이천, 여주 등지에 정착해 요장을 열어 도예촌을 형성하면서 청자, 고백자 등을 작업했습니다. 1970년대 도예가들은 당시 훌륭한 수출역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기술자 출신이어서, 전통의 본색을 바라보고 연구하는 문화적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 산업에 주안 했기에, 1980년대 일본에서 꾸준히 유입되었던 관광객이 급감하자마자 심한 불황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 점차 대학 졸업 후, 서구 조형을 추종하며 활동하던 작가들이 우리 도자 전통의 수법과 표현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주로 선택한 것은 청자나 백자가 아닌 분청이 많았습니다. 왜 그들은 분청을 선택했을까요? 그들은 분청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이제부터 그 이유를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려면, 앞서 1부에서 짧게 언급했던 옛 분청사기를 좀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후 한국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 그리고 옛 도공의 후예들인 현대 도예가들이 옛 분청의 어떠한 면모에 매료되었는지, 그로부터 이끌어낸 새로운 창작은 어떠한지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