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보고도
사람을 본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말은 괜찮았고, 행동도 매끄러웠지만
곁에 있자니 자꾸 내가 뒤틀리는 감각.
조용한 불편함.
설명되지 않는 불균형.
말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내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경우.
나는 그걸 이제
에너지장의 질감이 다르다고 표현한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편안하다.
겉으로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
그저 곁에만 있어도 숨이 쉬어진다.
방어하지 않아도 되고,
나를 조작하거나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꾸 눈치를 보게 만든다.
내가 나이길 멈추고,
그 사람의 리듬에 맞춰 나를 수정하게 된다.
그렇게 잠시 머물다 보면,
점점 내가 나 같지 않다.
그게 가장 무서운 일이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인간에게는 ‘고통의 몸(pain-body)’이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 처리되지 않은 감정과 상처가
무의식에 남아
하나의 정서적 실체처럼 작동한다는 개념이다.
이 고통의 몸은 자극과 혼란을 먹고 산다.
사랑을 원하면서도,
평화 속에서는 불안해진다.
그래서 갈등을 일으키고,
감정적 파열을 반복해서 만들어낸다.
그들은 종종 말한다.
“나는 드라마틱한 삶을 원하지 않아.”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그들의 무의식은 늘 자극을 갈망한다.
왜냐하면
조용하면, 아프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진짜로 사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사랑을 한다.
사랑이 감정의 도피처가 되고,
사람이 진통제가 된다.
그런 관계는 금세 혼란스럽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 사람의 그림자에 휘말린다.
그리고 결국,
내 안의 리듬까지 무너진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관계는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장(field)이다.
너무 오래 머무르면
그 사람의 감정 구조, 언어 습관, 사고 패턴이
내 안에 이식된다.
처음엔 단지 피곤했고
그 다음엔 내가 더 민감해졌고
나중엔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때 비로소
‘사람을 잘못 만났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에너지장이 침식당하고 있었다는 걸
늦게서야 깨닫게 된다.
어떤 관계는 설명이 필요 없다.
곁에 있으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편안해지는가
경계가 사라지는가
나다워지는가
더 명료해지는가
혹은 반대로
피곤한가
자꾸 나를 설명하게 되는가
헷갈리고 불편한가
감정이 무거운가
그 차이는 말이 아니라
느낌이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말보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내 상태를 봐야 한다.
사랑은 시작보다,
곁에 있을수록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변해가는지를 보는 것이다.
나를 잃어가면서까지
지켜야 할 관계는 없다.
아무리 감정이 크더라도
나 자신이 사라지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상대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보다
내가 그 곁에서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본다.
편해지는가.
깊어지는가.
명료해지는가.
나로 살아지는가.
그게 모든 관계의 본질적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제는 관계를 선택할 때
그 사람의 말투보다
그 사람 곁에서 내가 어떤 파장을 갖게 되는지를 먼저 본다.
내가 흐려지지 않고,
작아지지 않고,
불안해지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 옆에
천천히, 조용히
머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