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에 대하여

기억 상실은 때때로 사랑의 부재가 아니다

by 야옹이


어떤 사람은 사소한 약속을 잊는다.
생일을 잊고, 중요한 말을 흘리고,
어제 했던 말을 오늘 모른다고 한다.

우리는 그 순간,
혼자 기억을 꼭 쥔 채
마음 한편이 서늘해진다.
“내가 이토록 또렷이 기억하는 걸,
저 사람은 어쩌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곧, 묻는다.
"나를 무시하는 걸까?"
"정말 별로였던 걸까?"
"진심이 아니었나?"

하지만 때로 그들은 우리를 무시한 게 아니라,
정말로 잊은 것일 수도 있다.
기억의 부재는 무심함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비워낸 여백이었을지도 모른다.

뇌는 너무 아프면 기억을 지운다
사람의 뇌는 고통이 너무 클 때,
그것을 온전히 저장하지 않는다.
너무나 괴로운 순간을 잊는 쪽이 덜 아프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성의 없는 게 아니다.
그저, 정신이 너무 많은 일을 겪었고
그 결과로, 무언가를 지워야만 했던 것이다.

그 기억 속에 우리가 들어 있었더라도
그건 우리를 덜 소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너무 많이 상처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트라우마는 말없이 사라진다
트라우마는 항상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때로는 조용히 스며들어,
시간 전체를 흐릿하게 만든다.

“그날? 솔직히 기억이 안 나.”
“그해는 그냥… 멍했던 것 같아.”

이런 말들 뒤에는
말할 수 없는 밤들과, 견디기 위한 선택들이 숨어 있다.
기억은 있지만, 말로 옮길 수 없는 기억.
기억은 있지만, 꺼내면 무너져버릴 것 같은 기억.

생존과 기억은 공존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들이 어떤 기억을 잊었다면,
그건 ‘기억보다 생존이 더 시급했기 때문’ 일 수 있다.
눈을 깜빡이는 사이 계절이 사라졌고,
시간은 그들 안에서 조용히 증발했다.

우울은 기쁨만을 앗아가는 게 아니다.
시간 자체를 훔친다.
계절은 흘렀고, 당신은 기다렸지만
그들은 그 계절조차 느낄 수 없었다.

공백을 살아내는 사람들
기억을 잃었다는 건, 감당하기 벅찬 상처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신호일 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잊기 위해 잊은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잊었다.

이건 무책임도, 무관심도 아니다.
고통에 저항한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지워진 기억 대신
오늘 하루를 살아낼 힘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때로,
그 기억의 공백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것이
‘치유’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상실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기억 속에 우리가 없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들의 뇌가
그 사랑조차 지워야 했을 정도로 벅찼던 것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듯 보여도
그 안엔 보이지 않는 구멍이 있다.
그 구멍 속엔
잊으려 했던 과거가 있고,
잊지 못해 괴로웠던 시간들이 있다.

그리고 그 상실의 흔적 위에,
오늘도 조용히 살아가는 누군가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부드러워져야 한다
가장 강해 보이는 사람조차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지니고 있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잃고도 계속 걸어가는 사람들일 지도 모른다.

그들의 조용함은
무관심이 아니라, 고통 위에 쌓은 침묵이지 않을까?
그들의 망각은
게으름이 아니라, 감정의 무게에 대한 저항일 수도 있다.

그들의 빈칸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버틸 수 있었던 공간의 흔적이다.

그러니 말 없는 이에게도 말을 걸고,
기억하지 못하는 이에게도 마음을 건네보자.
기억의 부재를 탓하기보다,
그들이 여전히 여기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그들이 기억해내지 못해도,
우리의 마음은 그 빈칸을 따뜻하게 채울 수 있다.
그게 그들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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