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영웅들(2)

1부. 대한제국의 몰락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 , 1장. 대한제국의 패망

by 이문웅

1) 조선의 쇠퇴와 대한제국의 성립

19세기 후반, 조선 왕조는 여러 가지 내부적,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조선은 오랜 기간 동안 봉건적인 체제를 유지하며 사회적 불평등과 부패가 심화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국가의 효율적인 통치와 개혁을 어렵게 만들었다.

조선 후기에는 정치적 부패와 무능이 만연했다. 세도 정치와 고위 관료의 부패는 행정의 비효율성을 초래하고, 민심을 잃게 만들었다. 왕권이 약화되면서 지역의 지배 세력들이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었다. 조선 사회는 신분제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불안정했다. 농민들의 빈곤과 사회적 불만은 심화되었고, 이에 따른 농민 반란과 사회적 저항이 빈번했다. 경제적 어려움과 자연재해는 국가 재정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19세기 중반부터 조선은 서구 열강과 일본의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조선에 군함을 보내 개항을 강요하면서 조선의 개항과 외교적 무역 협정 체결이 시작되었고 이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1876) 체결로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침투가 본격화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 전 세계는 모두 열강들의 경쟁이 심각해질 무렵이었고 조선은 그런 세계사적 흐름에 매우 눈이 어두웠던 것이다.

조선 왕조의 쇠퇴와 외세의 압박 속에서, 고종 황제는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국가의 근대화를 시도했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하며, 다음과 같은 배경과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대한제국의 설립은 국가의 독립성과 근대화를 목표로 했다는 것이다. 고종은 조선의 왕권을 강화하고,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가 체제를 새롭게 개편하고자 했다. 대한제국은 왕권 중심의 국가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대한제국의 설립은 국제적인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을사늑약(1905)을 강요하며,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과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대한제국은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시도했으나, 내부적인 갈등과 저항에 직면했다. 개혁 정책은 정치적, 사회적 저항을 일으켰고, 이는 대한제국의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했다. 대한제국은 국제적 열강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했으나, 일본의 군사적, 정치적 압박에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개혁을 방해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성을 약화시켰다.

대한제국의 성립과정은 한국이 근대 국가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의미하지만,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그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대한제국은 근대화를 위한 중요한 시도를 했으나, 국제적 압박과 내부의 분열로 인해 결국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2) 일제의 침략과 을사늑약

19세기말, 일본 제국은 동아시아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일본은 국제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았고, 이를 통해 아시아 대륙에서의 군사적, 경제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일본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며 조선과의 무역 및 외교 관계를 개시했다. 이 조약은 조선의 개방과 일본의 경제적 권익을 보장하는 것이었으며, 일본의 군사적 압박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일본은 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내정을 간섭하며,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를 물리치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전쟁 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1895)에서 청나라는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였지만, 일본의 지배적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왜냐면 이 것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어서 일본이 더 쉽게 조선의 식민지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었다. 이어서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발발했고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권리를 더욱 공고히 했다. 전쟁 후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1905)에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인정받았고, 이는 조선의 독립적 외교권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당시 참 불편한 내용은 자국이 아닌 이웃 나라의 운명을 일본, 중국, 러시아가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외교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 것은 결국 국가의 4요소에서 심각한 한 가지 요소의 결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을 강요하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독립성과 주권을 심각하게 훼손하며, 일본의 지배를 법적으로 확립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 순간이다.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은 일본과 대한제국 간에 체결된 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위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협약의 주요 내용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 문제를 독점적으로 처리하고, 외국과의 조약 체결에 대한 대한제국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의 지배 하에 두겠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에 의해 강요되었으며, 협약 체결 과정에서 대한제국 측의 반대 의견이나 협의가 전혀 없었습니다. 일본은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군사적 압박과 외교적 협박을 사용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 내부에서는 큰 반발과 저항이 일어났다. 민족주의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불법적인 조약 체결을 강력히 반대하며, 독립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무효화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중 한 사건이 헤이그 밀사 사건이다. 국제 사회에서도 을사늑약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일부 외국 정부와 인권 단체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일본은 국제 사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의 외교적 독립성을 계속해서 제한하며 보호국으로서의 지위를 주장했다.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행정적, 군사적 권한을 더욱 강화하며 식민지 지배를 확립했다.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으며, 대한제국의 독립성과 자치권은 실질적으로 상실되었다.

1910년에는 경술국치(한일병합 조약)를 통해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공식적으로 병합되었고, 일본의 식민지로 완전히 전락하게 되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본의 손에 넘어가며, 한국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내용들은 현재 한국사에 나오는 정사의 내용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내용은 일본에 의해 공식적으로 병합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일본의 손으로 넘어가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는 내용은 결국 한반도는 일본화되었다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전환점이라는 말은 국권 회복 또는 새로운 나라 건국 둘 중의 한 가지의 운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국권 회복이라면 대한제국으로의 회귀인데 우리는 임시정부의 헌법 전문을 보면 그런 내용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임시정부 헌장이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한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누린다.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다.

제7조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에 의해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고 나아가 인류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국제연맹에 가입한다.

제8조 대한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한다.

제9조 생명형, 신체형 및 공창제(公娼制)를 전부 폐지한다.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한다.

우리는 위 임시헌장에서 대한제국 즉, 성리학적 신분제도를 기반으로 세워진 조선의 국가제도는 완전히 찾아볼 수가 없다. 즉, 대한민국이 취하고 있는 나라를 건국하고자 했던 의도가 모두 들어가 있다. 그래서 3.1 정신을 계승하고 임시정부의 적통을 이어받는다는 현재 헌법 전문은 모두 그 역사적 정통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아직도 새로운 국가와 대한지국의 국권회복 사이에서 처음에는 흔들리고 있었다. 이른바 양동 작전 같은 눈치 보기가 들어가 있다. 바로 대한 황실을 우대한다라는 제8조 조항이다. 이 조항은 4월 11일 임시정부가 설립될 당시에만 들어가 있던 것으로 임시헌법 즉, 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9월 11일에는 삭제되면 임시헌법이라는 명칭으로 변경을 하며 이 내용은 삭제되었다. 즉, 대한제국으로의 회귀라든지 대한제국 발전적 모형이라든지 이상한 수식어구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새로운 국가를 위한 임시 헌법이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을사늑약 체결일인 1910년 8월 29일 즈음인 7월에 이회영외 6형제는 모든 재산을 급히 처분하고 노비들은 풀어주었다. 그리고 이화영 일가는 만주로 망명을 하였고 그들은 새로운 나라를 위한 사람들을 배출해 내기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3) 대한제국의 내부 분열과 국제 정세

대한제국은 1897년에 고종 황제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며 성립되었지만,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개혁에 대한 반발로 인해 극심한 분열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내부 분열은 결국 국가의 통치력 약화와 외세에 대한 저항 능력을 저해하였고, 이는 일제의 침략을 용이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대한제국 정부 내에서는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개혁파와 전통적인 질서를 유지하려는 수구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개혁파는 서양식 근대화를 통해 국가의 군사적, 경제적 역량을 강화하려 했으나, 수구파는 이러한 변화가 전통적인 질서를 위협한다고 보며 반발했다.

특히, 1894년 갑오개혁과 1895년 을미개혁을 통해 이루어진 정치, 경제, 사회 제도의 개혁은 수구파의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개혁의 실패와 혼란 속에서 고종 황제는 안정적인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고, 왕실 내부에서도 권력 다툼이 벌어지며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고종 황제의 외척과 측근들 사이에서도 권력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왕실 내부에서 명성황후의 암살(1895)과 같은 사건은 권력 투쟁의 심각성을 나타내며, 대한제국의 정치적 안정성을 더욱 위태롭게 했다. 명성황후의 죽음 이후 고종은 더욱 외세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고, 이는 내외부적으로 대한제국의 독립성과 자주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왕실 내부의 갈등은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 혼선을 야기했고, 이러한 상황은 일본과 같은 외세가 대한제국에 간섭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대한제국의 관료 체제는 부패와 무능으로 인해 신뢰를 잃고 있었다. 지방 관리들의 부패와 비리는 농민들과 민중들로부터의 불만을 고조시켰고, 정부의 재정 상태는 날로 악화되었다. 관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며, 대한제국의 중앙정부는 지역 통제력과 민중의 신뢰를 상실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적 갈등과 불안정성이 증대되었고, 지방의 저항 운동과 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대한제국의 통치 기반은 점차 약화되었다.

한편, 대한제국의 내부 분열은 민족주의자들과 건국운동가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대한제국의 무능한 정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러한 민족운동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거나 그 방향성을 지도하지 못하였고, 이는 곧 일본의 침략과 외세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대한제국의 내부 분열은 외세의 압박 속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19세기말부터 동아시아에서의 국제 정세는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으며, 특히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상황에서 대한제국은 그 위치를 지키기 어려웠다.

19세기말, 동아시아 지역은 서구 열강들(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과 일본의 세력 다툼의 무대가 되었다. 이들은 조선을 비롯한 한반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여기며 각자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지배권을 강화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주장하며, 대한제국의 외교적 자주성을 박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904년부터 1905년까지 진행된 러일전쟁은 대한제국의 운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1905)에서 미국과 유럽 열강들로부터 조선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을사늑약(1905)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을 사실상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제 사회에서 독립된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서문에서 맑혔듯이 몬테비데오 협약에서 국가의 4대 요소를 말했는데 국가의 주권은 바로 외교적 능력이었다. 대한제국은 일본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열강들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을 맞추려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고종 황제는 국제 사회에 대한 외교적 지지를 호소했으나, 열강들 사이의 이해관계와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으로 인해 실질적인 지원을 얻기 어려웠다. 또한, 대한제국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과 분열로 인해 외교적 대응이 일관되지 못했고, 이는 외교적 고립을 심화시켰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적 실패를 이용해 점차 내정을 간섭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계획을 체계적으로 추진했다.

결론적으로, 대한제국의 내부 분열은 외세의 압력 속에서 더욱 심화되었고, 이는 결국 대한제국이 일본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되었다. 개혁파와 수구파 간의 갈등, 왕실 내부의 권력 투쟁, 관료 체제의 부패와 무능은 대한제국의 정치적 안정을 저해하였으며,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일본의 팽창주의적 야망 속에서 대한제국은 외교적 고립과 식민지화를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심리가 생겨나기 시작한 배경이고 독립과 자주성을 통한 새로운 국가 건설인 건국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keyword
이전 01화대한민국, 건국 영웅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