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영웅들(3)

2장: 갑신정변과 근대적 개혁의 시도

by 이문웅

1) 김옥균과 개화파의 개혁 노력

19세기 후반, 조선은 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중국의 청나라와 일본이 빠르게 근대화의 길을 걷고 있던 시기에 조선은 여전히 전통적 유교 체제에 갇혀 사회적, 경제적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인사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개화파는 서구의 근대적 사상과 기술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특히 김옥균은 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개혁의 최전선에 섰다.

김옥균은 청나라와 일본을 방문하면서, 서구 문물과 기술의 우수성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조선이 자주독립을 유지하고 근대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서구의 과학 기술과 정치 제도를 도입해 조선의 낙후된 사회 구조를 혁신해야 한다는 것이 김옥균의 신념이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 정부와 민중을 설득하고자 했으며, 그는 특히 일본의 개화 과정을 참고하여, 조선에도 유사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개혁 사상은 주로 국방 강화, 교육 개혁, 사회적 불평등 해소, 경제 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개화사상에 동조하는 젊은 관료들과 지식인들을 규합하여 개화파를 형성했다. 개화파는 내부적으로는 전통적인 보수파와의 충돌을 피하면서도, 외부적으로는 개혁을 위해 과감한 정치적, 군사적 시도를 준비했다. 김옥균과 개화파는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서구식 근대 학교를 설립하고 신식 군대를 창설하여 국방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또한, 국가의 재정 수입을 증가시키기 위해 새로운 세제 개혁과 상공업 진흥책을 제안했다.

그러나 개화파의 개혁 노력은 전통적인 지배층인 보수파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보수파는 외세의 영향을 받은 개화파의 사상이 전통적인 유교 사회 질서를 파괴한다고 보았으며, 특히 왕실과 지방의 유력한 양반 계층이 개화파의 움직임을 저지하려고 했다. 개화파의 영향력은 점점 더 제한적이 되었고, 김옥균과 그의 동료들은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정변(쿠데타)을 기획하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청나라의 간섭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를 반영하고 있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과 개화파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신식 군대와 함께 궁궐을 장악하고, 보수파 관료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김옥균은 새로운 근대적 정부를 구성하고자 하는 개혁안을 발표하며 조선의 개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인해 불과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청나라는 조선의 종주국으로서 자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고, 김옥균의 개혁 시도가 이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개화파는 군사적, 외교적으로 미숙했고, 일본의 제한된 지원으로 인해 청군에 맞설 충분한 힘을 갖추지 못했다.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처형되었고, 개화파의 개혁 시도는 중단되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더욱 보수화되었고, 청나라의 간섭은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전략을 수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조선 사회에 근대적 개혁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김옥균과 개화파의 시도는 후일 조선이 다시 근대화를 논의하고 개혁의 길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갑신정변의 개혁 내용에 대해서 면밀히 살펴보고 사유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청나라 중국의 신하국이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내용으로 볼 때 그 당시의 개혁은 기존 청나라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큰 개혁의 과제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래서 개혁파 김옥균은 일본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정변을 일으켰으나 일본은 더 이상 정변 속으로 들어가려 하질 않았다. 결국 청년 김옥균과 개화파들은 나중에 민 씨 척족들을 위시로 하여 김옥균과 그 친구들을 모두 암살하려 했고 거의 암살했다. 안타까운 것은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노력이 바로 근대화라는 선개혁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조선은 우수한 유학 개혁파들을 기존에 있던 양반들이 탄압을 한 꼴이 되어 버린다. 훗날 약 25년 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해 들어가기 전에 일본을 배워서 개화를 통해 근대화를 이루고 국가 시스템을 개혁하려는 의지를 조선의 위정자들이 배웠더라면 김옥균과 그 친구들은 그리 짧은 인생을 살고 비운의 삶을 마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2) 갑신정변의 발발과 실패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 인사들이 조선을 근대적 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해 일으킨 3일간의 쿠데타이다. 갑신정변은 조선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목표로, 강력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시도한 사건이었다.

1880년대, 조선은 개항 이후 외세의 압박과 국내 개혁 요구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의 영향력 하에 있었고, 이로 인해 자주적인 정책을 펼치기 어려운 상태였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인사들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조선을 독립적이고 근대적인 국가로 개혁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정치 변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개화파는 당시 청나라의 간섭에 반대하는 일본 정부와 연계를 강화하며,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얻고자 했다. 김옥균과 그의 동료들은 일본의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와 접촉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또한, 개화파는 조선 내에서 개혁을 지지하는 군인과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협조를 얻어 궁궐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1884년 12월 4일, 개화파는 우정국(郵政局)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감행했다. 축하연에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비롯한 조선의 고위 관료들이 참석했고, 개화파는 이를 이용해 정부의 핵심 인사들을 한꺼번에 제거하려고 했다.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파 지도자들은 별기군을 동원해 궁궐을 장악하고, 보수파 지도자들을 체포하거나 제거했다. 개화파는 고종을 압박하여 새로운 개혁 정권을 수립하고, 정부의 주요 관직에 자신들의 인사를 임명했다. 이들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개혁 조치를 발표하며,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고자 했다.

갑신정변의 가장 큰 실패 원인은 청나라의 신속하고 강력한 군사 개입이었다. 정변이 일어나자마자 청나라 주둔군 사령관인 위안스카이(원세계)는 즉각 군대를 동원해 반격을 가했다. 개화파는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기대했지만, 일본은 예상과 달리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일본군은 조선 주재 청군과 충돌을 피하려 하였고, 결국 청군이 우세한 상황에서 개화파는 군사적 열세에 빠지게 되었다. 청나라 군대는 정변 발생 3일 만에 한성으로 진입하여 개화파 세력을 진압하였다. 이로 인해 갑신정변은 시작된 지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개화파는 정변을 계획하는 데 있어 내부 준비가 미흡했고, 군사적 역량이 부족했다. 별기군 등 신식 군대의 지원을 받긴 했으나, 전체 군사력과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장기적인 저항이 불가능했다. 개화파는 보수파의 저항을 예상했지만, 청나라 군대의 즉각적인 개입을 막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개화파의 개혁이 사회 전반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점도 큰 문제였다. 개화파의 급진적인 개혁 계획은 양반 지주층을 비롯한 보수 세력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로부터도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했다. 특히 농민과 서민들은 개화파의 개혁이 자신들의 삶에 직접적인 혜택을 줄 것이라는 신뢰를 갖지 못했으며, 이는 개화파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갑신정변은 일본의 도움을 받는 것을 전제로 했으나, 일본은 청나라와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개화파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와의 경쟁 속에서 이익을 도모하고 있었으나, 갑신정변이 실패할 경우 자국의 이익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소극적 대응은 개화파의 군사적 지원을 크게 약화시켰고, 청나라의 개입을 막을 수 없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김옥균을 비롯한 주요 개화파 지도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개화파는 사실상 조선 내에서 정치적 세력으로서의 존재감을 상실했다. 정변 이후 조선 정부는 보수적인 정책을 강화하며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시작했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는 이후 조선에 대한 군사적, 외교적 간섭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조선 정부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력을 강화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청나라의 반식민지적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우리는 조선의 건국 당시부터 명나라에게 조공을 바치던 조공국이었는데 이제 청나라로 바뀌고 청에게 마저 아무 소리도 못하는 이른바 신하의 나라였던 것이다.

갑신정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 사회에 근대적 개혁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이후 조선 내에서는 개화와 자주독립을 위한 다양한 개혁 논의가 이어졌으며, 이는 향후 동학농민운동갑오개혁(1894) 등의 사회적 변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 당시 조선의 대다수는 개혁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도 못했고 그 당위성조차 만들지 못하던 안타까운 시절이었다.

갑신정변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개화파가 감행한 급진적 시도였지만, 청나라의 즉각적인 개입과 일본의 소극적 태도, 그리고 국내 지지 기반의 약화로 인해 실패로 끝났지만 갑신정변은 조선 사회에 근대적 개혁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사건으로, 이후 개혁과 자주독립과 건국을 위한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갑신정변이 남긴 유산과 건국운동의 시발점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가 조선을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해 일으킨 3일간의 쿠데타였다. 비록 정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조선의 역사와 근대화 과정에 여러 가지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갑신정변은 조선 사회에 근대적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개화파의 급진적인 개혁 시도는 조선의 전통적 봉건 질서가 외세의 침략과 국제적 경쟁 속에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은 일시적으로 보수화되었지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널리 확산되었다.

특히 고종과 조선의 관료층은 이후 개화 정책의 중요성을 더욱 고민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고종이 갑오개혁(1894)과 같은 보다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갑신정변은 결과적으로 개혁의 불가피성을 조선 사회 전체에 심어주었으며, 이로 인해 개화파의 사상은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갑신정변은 조선과 외국, 특히 일본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재조명하게 만들었다. 개화파가 일본의 도움을 받아 정변을 일으킨 것은 조선이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일본의 소극적 태도와 청나라의 강력한 개입은 조선이 자주독립의 길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외세와의 관계에서 보다 신중한 외교적 접근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이후의 개혁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강대국들과의 균형 있는 관계 설정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조선 내외의 개화파 인사들은 각기 다른 경로로 개혁을 계속 추구했다.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파 인사들은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더 깊이 접하며, 조선의 근대화와 개혁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이들은 나중에 서재필이나 윤치호와 같은 인물들로 성장하여, 조선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갑신정변은 근대적 개혁과 독립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중요한 정치적 리더십의 필요성을 각인시켰다. 김옥균의 급진적 개혁 사상은 후일 개혁과 독립운동에 나선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들은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정치적, 사회적 운동을 전개했다.

갑신정변은 비록 실패했지만, 이후 조선이 자주독립과 근대적 개혁을 이루기 위한 보다 본격적인 건국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갑신정변은 조선의 지식인들과 청년들에게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주적인 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특히 청나라의 간섭과 일본의 불확실한 지원이 조선의 자주적 개혁을 좌절시켰다는 점은 이후 조선 사회에서 ‘자주독립’이라는 목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자주독립 의식은 갑신정변 이후 점차 고조되었고, 이는 곧 독립협회(1896년 설립)와 같은 정치 단체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독립협회는 조선의 자주적 정치 체제 확립과 근대화된 국가 건설을 목표로 활동하면서, 갑신정변의 정신을 이어받아 근대적 건국운동의 초석을 다졌다.

갑신정변을 통해 김옥균과 개화파가 주장한 근대적 개혁 사상은 이후 조선 사회에 민주적 민권 사상의 씨앗을 뿌리는 계기가 되었다. 개화파는 근대적 정부 수립, 군주제 개혁, 근대적 법제도 도입을 주장하며 조선의 전통적인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를 개혁하려 했다. 이들은 근대 국가의 핵심 원리인 국민주권자유주의를 주창했고, 이는 이후 여러 독립운동과 정치 운동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특히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합병 이후 한반도에서 펼쳐진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개화파의 유산은 후일 상해 임시정부의 설립과 같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정부 수립 시도에서도 중요한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갑신정변은 조선의 근대화와 독립을 위한 건국운동이 단순한 정치적 변혁이 아닌, 사회 전반의 제도적 개혁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함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이후의 독립운동가들은 개화파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보다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독립운동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10년대의 독립운동가들은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로 내부 준비 부족과 외세의 지원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들었으며, 이를 반성하여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만주에서의 독립군 양성과 자주적인 외교 노선의 채택으로 나타났다.

결국, 갑신정변은 조선의 근대적 개혁을 향한 초기 시도였고,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그로 인해 조선 사회는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새로운 인식과 운동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갑신정변은 이후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며, 근대적 건국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조선의 지식인들과 민중은 갑신정변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체계적이고 자주적인 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이는 이후 대한민국 건국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임시정부의 요원들이 김옥균 같은 개화사상에 동의했는가는 사실상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냐면 김옥균이 유학을 통해 배운 나라는 일본이었고 참여한 개화파 모두는 후쿠자와 유키치 선생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일본으로부터 배운 선진 문물을 훗날 1909년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마저 일본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제 임시정부의 적은 일본인데 그동안 개혁의 협조자는 일본이었다는 것이 아이러니로 발생하는 것이다. 이제 일본이 저지른 침략으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투쟁 전략이 건국운동의 핵심이 되어 버린 것이다. 왜냐면 이제 망해서 사라진 나라를 개혁할 필요는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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