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고종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에 즉위했다. 이는 조선 왕조의 전통적 틀을 넘어 독립적이고 강한 근대 국가로 나아가고자 하는 상징적 선언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는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휘말렸고, 국권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에 넘어갔고, 실질적으로 국가는 일본의 지배 아래 놓였다. 이 시기,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는 이름뿐인 존재로 전락했지만,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는 독립과 자주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며 "대한 만세(코레아 우라)"를 외쳤다. 하지만 그가 외친 "대한 만세"는 단순히 대한제국의 국호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과 대한제국을 넘어선 새로운 공동체적 정체성과 독립 의지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1910년,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는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독립운동가들은 '대한'이라는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다. 상해임시정부를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 조직은 자신들을 '대한인'이라 부르며 조선 왕조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1910년대 이후, 독립운동의 구호는 점차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대한의 독립'은 '민족의 독립'으로, '조선의 독립'은 '민족 자결'로 바뀌었다. 새로운 구호에서 등장한 '민족'이라는 단어는 당시 세계적 흐름과 맞물려 있었다. 하지만 이 단어의 기원을 살펴보면, 그것은 뜻밖에도 이토 히로부미가 쓴 <민족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저서 '민족론'에서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일본 내부의 단결과 팽창을 위한 명분을 제시했다. 그는 이 단어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고, 아시아의 통합을 도모하려 했다. 하지만 이토의 민족론은 서양 민족주의의 핵심인 독립과 자결을 강조하는 대신, 일본 중심의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논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토에게 '민족'은 일본의 단결과 팽창의 이념적 도구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독립운동가들은 이런 단어를 받아들였을까? '민족'이라는 단어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조선이라는 좁은 틀을 넘어, 흩어진 대한인들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상징이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조선'이라는 이름은 과거의 잔재처럼 여겨졌고, '민족'이라는 단어는 더 광범위하고 국제적인 정체성을 담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의문을 품게 된다. 굳이 일본 제국주의가 주장했던 단어를 사용해야만 했을까?
독립운동가들은 그 단어를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일본의 논리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려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선택이 전략적이었는지, 아니면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채택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결국, '민족'이라는 단어는 일본 제국주의의 논리에서 시작되었지만, 독립운동의 구호로 사용되면서 그 의미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처했던 딜레마와 선택의 무게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민족이라는 단어는 과연 우리의 것이었을까?
아직도 민족이라는 단어가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단어라고 사기치는 그릇된 민족주의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하고싶은 말을 종교적 신념으로 만들어 종교화하는 것은 자신의 머리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 행위를 세상으로 확성시킨다면 그 자체로 사기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