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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내는 법

by 이문웅

살다 보면, 무너지지 않으려 애써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지만, 속은 서서히 금이 가는 것을 느낀다.
누구도 묻지 않지만 스스로 묻는다.
‘괜찮은가? 나는 정말 괜찮은가?’


그런데 이 나이쯤 되면,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법을 배운다.


누군가의 기대에, 가족의 무게에, 사회의 속도에
쉽게 멈추지도, 주저앉지도 못하고
그냥 ‘견뎌야 한다’는 말에 자신을 묶는다.


그러나 견딘다는 건 무엇일까?
그건 그저 고통을 품고 있는 일일까?
아니면 내 안의 응어리를 잘게 부수고,
어느 날 갑자기 흘려보낼 수 있는 용기를 준비하는 일일까?

나는 견딘다는 말의 이면을 오래 생각해왔다.

그건 사실, 조용한 병이다.
감정을 삼키고, 아무 말 없이 하루를 넘기고,
속으로 ‘괜찮아, 지나가겠지’라며 어른스러운 척 하지만
그 병은 점점 깊고 조용히 자라난다.
스트레스는 쌓이고, 그것은 마음의 체온을 잃게 만든다.


그래서 견딘다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라 회복의 기술이 함께여야 한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되, 고통 속에 가라앉지도 않는 것.
그것을 마주 보되, 흡수하지 않는 것.
그 고요한 절제를 나는 ‘회복’이라고 부른다.

회복이란 내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말이나 글로, 혹은 산책이나 침묵으로
서서히 잘게 부수어 물처럼 흘려보내는 일이다.

어디론가 흘려보낼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절반은 치유된 것이다.
눈물이 날 때는 흘리면 된다.
소리 내어 말할 사람이 있다면 말하면 된다.
말할 수 없다면, 글이라도 써야 한다.
어느 방향이든, 내 안의 병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종종 푸쉬킨을 떠올린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쁜 날이 오리니.”

그의 이 구절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들려주는 위로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가혹한 현실 속에서 나온 시였다.

푸쉬킨은 1799년 제정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던 시대는 황제의 전제 정치와 혹독한 검열의 시대였다.
자유주의와 계몽사상이 러시아에도 퍼졌지만,
그것은 왕정의 감시 아래에서 숨죽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푸쉬킨은 자유를 노래했고, 인간의 존엄을 시로 썼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위험 인물이 되었고,
황제의 명으로 수차례 유배를 당해야 했다.
그는 혁명을 외치진 않았지만, 시로 혁명을 암시했고,
사상적 반역자로 낙인찍히며 검열과 감시 속에서
자신의 이상과 삶 사이를 줄타기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하는 아내를 둘러싼 모욕과 질투, 명예 문제로
결투를 벌이다 서른여덟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그는 그의 시처럼, 너무도 슬프게, 너무도 빠르게
세상을 속절없이 떠났다.

그런 그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고 말했다.
그것은 단순한 시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시대 전체를 향한 침묵의 철학이었다.

그 말을 곱씹을수록 나는
견딘다는 말이 단순히 울지 않는 태도가 아님을 깨닫는다.
진정한 견딤은 그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일이다.
외부에 무릎 꿇지 않고,
내면의 기둥을 지켜내는 사람만이
무너졌을지언정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나는 말하고 싶다.
무너지지 마라. 그러나, 무너졌더라도 다시 일어서라.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다.
무너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이다.
그것은 잔인할 정도로 강인한 생명력이다.
그 생명력은 체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건 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내 삶을 끝까지 끌어안으려는지에서 나온다.

삶은 우리를 속일 수 있다.
사람은 기대를 저버릴 수 있고,
상황은 예측할 수 없이 나빠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무너졌더라도, 다시 돌아오려는 마음 하나만으로
그건 이미 회복의 시작이다.


그렇게 우리는 견디고, 회복하고,
다시 살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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