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가장 먼저 체감하는 것은
하루하루 몸이 느끼는 불편이다.
무릎이 시리고, 어깨가 뻐근하며,
잠은 얕아지고, 회복은 더뎌진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이
더 이상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 된다.
하지만 그 현실은 불편함만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 늙어가는 몸 덕분에
비로소 '살아 있는 나'를 자주 자각하게 된다.
젊었을 땐 몸은 철저히 도구였다.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
내가 생각한 것을 실현시키는 기계.
하지만 나는 몸을 훈련시키고
단련하려는 노력은 하지않고 살았다.
영원할 것만 같던 육체는 점점 더
스트레스와 술과 담배에
찌들어 갔다.
그렇게 오랜 시간, 나는 몸을 혹사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와서야
그 몸이 어떤 방식으로 나를 견뎌왔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정신으로 이룬 것이라 믿었던 모든 시간에
사실은 몸이 나를 대신해 버텨준 부분이 훨씬 많았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 몸을 단지 기능의 집합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이자
내 삶의 기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몸은 나의 정직한 파트너다.
마음이 속일 수 있는 것들을
몸은 속이지 않는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몸은 그렇지 않다고 반응한다.
무리한 날은 피로로,
참아온 감정은 통증으로,
과도한 기대는 고장으로 되돌아온다.
이제 나는 그 신호를 무시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동안 내가 이 몸 덕분에 살 수 있었던 만큼,
이제는 내가 몸을 위해 살아야 할 때라는 생각을 한다.
몸을 아낀다는 것은
단순히 무리하지 않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건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여주는 일,
단련할 수 있을 때 단련하는 것,
그리고 늦지 않았을 때 회복을 시작하는 일이기도 하다.
‘운동’은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는 생존의 기본이며,
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존중이다.
오랜 시간 몸을 부려 써온 만큼,
이제라도 몸을 위한 시간을 조금 더 내야 한다.
게으름은 더는 자유가 아니라 방치이고,
그 방치는 언젠가 되돌릴 수 없는 결과로 다가온다.
나는 최근
몸과 화해하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일주일에 두 번 산을 오른다.
처음엔 무릎이 아팠고,
몸은 오랫동안 굳어 있던 관절과 근육을 불편해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면서
조금씩 내 몸이 다시 말을 걸기 시작했다.
무릎의 통증은 줄어들었고,
굳었던 관절은 다시 유연성을 회복해갔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몸이 맑아지자, 뇌도 맑아졌고,
그 맑음은 시선으로 이어져
눈마저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작은 변화는
내 하루를 바꾸고,
나아가 한 주 전체를 다르게 만든다.
몸이 정리되면 삶도 정돈된다.
이 단순한 진리를,
나는 이제서야 경험을 통해 실감하고 있다.
몸이 나에게 묻는다.
“이제는 너도 나를 위해 좀 움직여줄 수 있겠니?”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외면하지 않는다.
이 몸으로 살아간다는 건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안고 산다는 뜻이다.
더는 무한하지 않다는 것,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조건 안에서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려는 선택.
그것이 바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삶의 태도다.
몸을 사랑한다는 것은
멋지게 보이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몸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과도하게 몰아붙이지 않고,
아픈 걸 참고 참지 않으며,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하려 하지 않는 태도.
그러면서도
게으름으로 자기 몸을 소외시키지도 않는 것.
그건 무기력이 아니라 존중이며,
늦게라도 몸과 화해하려는 성숙의 태도다.
나는 이 몸으로 살아왔고,
이 몸으로 사랑했고,
이 몸으로 실수했고,
이 몸으로 견뎠다.
앞으로도 이 몸으로만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
그러니 지금, 이 몸으로 살아간다는 건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존재의 중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그 태도를 지닌 채
나는 오늘도, 조용히 다시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