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나이 드는 것을
‘잃어버리는 과정’으로만 말한다.
젊음, 속도, 탄력, 순발력, 기회…
이 모든 것이 점점 멀어지고 사라진다고 여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이 말을 바라본다.
나이 든다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변화'의 다른 이름이다.
줄어드는 것이 있는 만큼, 생겨나는 것도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무엇보다
자신의 '경계'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젊었을 땐 무한할 것 같던 에너지와 가능성이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히면서
나는 비로소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구분하게 되었다.
그건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속도를 늦추는 일이다.
하지만 느려졌다는 것은
덜 가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느려졌기에 더 많이 볼 수 있고,
덜 흘려보낼 수 있으며,
무심코 지나치던 장면들 앞에서
더 오래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젊을 때는 미처 질문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
이제는 멈춰서 묻고,
다시 생각하고,
때로는 그냥 조용히 받아들일 줄도 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나이 듦은 존재가 시간을 체화하는 방식이다.
시간은 인간에게 외부에서 주어진 조건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시간은
내 삶의 질감 속으로 스며든다.
‘몇 년을 살았다’는 숫자가 아니라
‘어떤 시간을 어떻게 통과했는가’라는
삶의 무게와 깊이로 바뀌어 간다.
몸은 분명 예전 같지 않다.
무릎이 시리고, 잠이 얕아지고,
이름이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불편함이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는 시기가 있다.
그건 아마도
몸의 감퇴만큼이나
마음의 관용이 늘어난 덕분일 것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고,
때로는 모르는 채 살아가도 된다는
어떤 인식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게 된다.
나이 든다는 것은 단지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가는 일이어야 한다.
나이만으로 성숙이 보장되지 않듯,
늙었다고 해서 모두가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란 책임을 지는 태도이고,
경험 위에 겸손을 얹을 줄 아는 사람이다.
이해하려는 마음, 받아들이는 자세,
그리고 무엇보다 조용히 물러날 줄 아는 품위를 가진 존재.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진짜로 나이 드는 길이다.
나이 들수록 관계의 밀도가 바뀐다.
많은 사람과 엮이는 것보다,
몇 사람과 깊이 있게 남는 일이 중요해진다.
그건 외로움의 수용이 아니라,
내 삶을 채우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증거다.
표면이 아닌 중심, 넓이보다 깊이를 택하게 된다.
그건 성장이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내적 변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 듦은
자신을 재정의하는 과정이다.
젊었을 땐 내가 하는 일,
내가 가진 직업,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
나의 정체성을 구성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모든 외적 정의 없이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졌다.
더는 설명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람,
그게 지금 내가 되고 싶은 인간형이다.
나이 든다는 건 결국
이 모든 불완전한 것들과
조용히 공존해가는 태도이다.
완벽하게 통제하지 않아도,
언제나 이해하지 않아도,
그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것.
그것은 단순한 노화의 수용이 아니다.
그건 존재에 대한 이해의 확장이며,
삶의 의미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을
이제야 진심으로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