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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속의 나

by 이문웅

현대인은 소음 속에 산다.

물리적 소음뿐 아니라,
정보의 소음, 관계의 소음, 감정의 소음.
우리는 늘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듣고 있고,
그 속에서 반응하며 살아간다.

그런 환경 속에서 ‘고요’는 낯선 것이 되었다.

조용한 방에 홀로 있으면 불안해진다.
무언가를 틀어야 하고,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어야만
존재가 확인되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사람들은 고요를 피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점점 반대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고요야말로 지금 내 삶에 필요한 환경이라고 느끼고 있다.

고요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것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고요한 순간,
나는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다른 사람도, 역할도, 기대도 모두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이다.

그 질문은 요란하게 오지 않는다.
고요는 묻지 않는다.
다만 나를 그 질문 앞에 세운다.
고요 속에서 나는 설명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된다.
그 누구에게도 증명할 필요 없는
가만히 ‘존재하는 자’로 남는다.

어릴 땐 조용한 시간이 따분했고,
젊었을 땐 고요한 순간이 어색했다.
하지만 지금은,
고요가 내 안에 있는 결핍을 비춰주는 유일한 거울 같다.

바쁘게 움직일 땐 보이지 않던 균열,
말이 많을수록 감춰졌던 감정들,
그 모든 것들이 고요 속에서 선명해진다.

고요는 치유의 전제다.
자극이 멈춰야 회복이 시작된다.
고요는 사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생각은 침묵의 틈에서 자라나고,
통찰은 조용한 응시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렇기에 고요는 결코 무기력의 표지가 아니다.
고요는 깊이이며,
깊이는 단단함으로 이어진다.

나는 요즘 의도적으로 고요를 선택한다.
아침에 핸드폰을 켜기 전 몇 분,
저녁에 조명을 낮추고 있는 시간,
말을 줄이고 생각을 길게 가져가는 하루의 틈.
그 틈 속에서 나는 내가 된다.
수많은 타인으로부터 벗어나,
'나'라는 존재로 회복되는 순간.

고요는 어느 순간 나이든 자에게 더 익숙해진다.

말할 기회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말하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줄어든다.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고,
동의받지 않아도 괜찮은 어떤 경지.
그 상태에서 삶은 비로소
더 유연하고 더 견고해진다.

내가 이토록 고요를 갈망하게 된 건,
삶의 많은 장면이
사실은 너무 소란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 소란이 꼭 외부에서 온 것은 아니다.
내 안의 조바심, 후회, 억울함, 욕망.
그 모든 내부의 소란을
이제는 잠시 쉬게 하고 싶어진다.

고요 속의 나는
더 이상 말로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다.
침묵도 하나의 태도이며,
그 침묵은 때로 어떤 논리보다 설득력이 있다.

그 조용한 나를 나는 점점 더 믿게 된다.

고요는 공간이 아니라 태도다.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마음 안에 머무는 정적이 있다면
그것이 곧 고요다.

그리고 나는 그 고요 속에서,
비로소 나 자신에게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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