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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기술

by 이문웅

우리는 너무 오래,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삶을 살아왔다.
해야 할 일, 해야 할 말, 해야 할 반응.
그 속에서 가만히 멍하니 있는 시간을
게으름이나 무기력으로 치부해 왔다.


하지만 나는 점점 깨닫는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은,
삶에서 가장 온전한 시간일 수 있다는 것을.

'멍함'은 비워진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받아들였기에
한순간 모든 판단과 반응을 내려놓는 태도다.
바로 그 순간, 인간은 ‘존재’로 회귀한다.


행위자가 아니라, 존재하는 자로.

가끔 나는 오피스텔 작은 공간에서
창밖으로 흐르는 구름이나,
출근하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
하늘 위로 기울어가는 해를 멍하니 바라본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실은 많은 것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되찾고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행동할 때 자신을 잃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행위로 자신을 정의하고,
행위의 결과로 존재를 설명한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 시간은
그 모든 정의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만든다.

나는 지금 무엇도 성취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게 멈춘 순간,
오히려 나는 더 분명히 나 자신이 된다.

이 시대는 너무 시끄럽다.
스크롤을 멈출 수 없고,
새로운 정보는 쉴 새 없이 쏟아지며,
침묵은 낭비로 취급된다.
‘멍하게’ 있는 사람은 어딘가 부족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은 그 멍함 속에서
우리는 감각을 회복하고,
세상에 대한 시선을 조율하며,
시간이라는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조율하는 법을 배운다.

철학은 늘 질문으로 시작된다.
그 질문은 대부분 ‘멍하니 있는 순간’에 찾아온다.


바쁘고 복잡할 땐 떠오르지 않던 사유가
어느 조용한 오후,
창밖의 나뭇잎 흔들림을 따라가다 문득 떠오른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 삶은 누구의 리듬으로 살아지고 있는가?”

나이 들면서 멍한 시간은 더 잦아진다.
집중력이 떨어진다기보다,
무언가를 굳이 판단하거나 논평하고 싶은 욕구가 줄어든다.
자꾸만 바깥세상보다 창밖을 보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멍한 시선 속에
내가 놓친 것들, 애써 덮은 감정들,
무심히 지나친 아름다움이 다시 떠오른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은
삶을 잠시 '정지'하는 기술이다.
그건 도피가 아니라
재정렬의 과정이다.
어쩌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진실과 감정은
항상 조금 느린 속도로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철학은 삶의 구조를 파고드는 일이다.
그 구조의 틈, 그 균열 속에서
‘멍함’은 훌륭한 입구가 된다.


멍한 시간 없이,
아무 질문도 자라지 않는다.
멍한 시선을 허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유는 시작된다.

나는 이 나이쯤 되어서야
멍하니 있는 시간이
나를 얼마나 건강하게 만드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건 마음의 물리치료와도 같다.
너무 많이 쓰인 감정,
지나치게 뻗은 생각,
무리하게 돌아간 판단을
다시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주는 시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기술은,
사실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그건 삶의 피로를 그대로 인정하고,
잠시 멈출 수 있는 용기다.

나는 이제 그 멍한 순간들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서,
나는 나를 가장 분명히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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