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시간을 건너는 존재다.
아무도 시간을 멈출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은 항상
우리 곁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시계 속에서 분 단위로,
몸의 변화 속에서 해마다,
마음의 틈 속에서는 아주 조용히 지나간다.
나는 자주 묻는다.
내가 건너온 시간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사진첩에 있는가?
기억 속 어렴풋한 장면들인가?
아니면 아직도 내 몸과 마음 어딘가에 눌어붙은 흔적인가?
어릴 적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제와 오늘, 내일의 차이도 크지 않았고
하루는 한없이 길게 느껴졌으며
다음 주가 오기까지가 고통스러울 만큼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시간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고,
눈을 감았다 뜨면 또 한 계절이 바뀌어 있다.
어제 분명히 봄이었는데,
오늘은 어느새 낙엽이 지고 있다.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반복 때문이다.
익숙한 일상은 기억에 덜 남는다.
기억에 남지 않으면 그 시기는 곧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건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건넌 줄도 모른 채 시간에 실려 흘러온다.
그게 두렵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기억하려 한다.
기록하고, 반추하고, 때때로 불러내서 되새긴다.
시간을 건넌다는 건,
물리적인 흐름을 지나온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무언가를 넘어서야 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어떤 사건,
어떤 상실,
어떤 관계의 끝.
그런 시간들은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흔히 말하는 ‘아직 거기 머물러 있는 사람’이란
그 시간을 건너지 못한 사람을 의미한다.
나 역시 그런 시간을 겪었다.
말할 수 없는 상실,
혼자서만 끙끙 앓았던 모멸감,
쉽게 꺼내지 못하는 부끄러움의 순간들.
그때 나는 그 시간 속에 갇혀 있었다.
마치 물속에서 숨을 참고 버티는 사람처럼
그 시간의 공기 속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그 시간을 건넜다.
시간이 나를 건넌 것인지,
내가 시간을 건넌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 시간을 등지고 있었다.
시간은 상처를 지워주지 않는다.
다만 상처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꾼다.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더 이상 나를 갉아먹지 않게,
그렇게 시간은 나를 다시 걷게 만든다.
건넌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는 가능성.
어떤 시간은 너무 커서
건너는 데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어떤 시간은 그리운 사람이 남아 있어서
되돌아보고 또 되돌아보게 만든다.
어떤 시간은 실패한 나를 떠올리게 해서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을
나는 결국 건넜고,
아직도 건너는 중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시간을 건너는 한 과정이다.
과거의 나를 불러내고,
지금의 나를 정리하며,
미래의 나를 준비한다.
글을 쓴다는 건
시간을 붙들고 마주 앉는 일이다.
그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나는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시간을 어떻게 건너야 덜 아플 수 있을지.
어떻게 건너야 후회가 덜 남을지.
그리고 어떤 시간을 붙들어야
진짜 나로 살 수 있을지를.
시간을 건넌다는 건
기억의 강을 하나씩 건너는 일이다.
어떤 다리는 튼튼하고,
어떤 다리는 삐걱거리지만
그 다리 끝에서 나는 항상 나를 다시 만난다.
조금 더 정리된 나,
조금 더 이해한 나,
그리고 조금 더 자유로워진 나.
그렇게 나는 오늘도
시간이라는 강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건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