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이 수행한 역사적 역할이 공화국의 건국이었다면, 그 이후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국가 생존의 문제는 박정희 정권이 떠안게 되었다. 이 두 시기는 종종 하나의 연속된 서사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과제와 조건 속에서 작동한 서로 다른 국가 운영의 국면이었다. 이승만 체제가 자유민주주의라는 국가의 형식과 외교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 다음 단계는 그 형식을 유지할 수 있는 물질적·경제적 기반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196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라는 이름만을 가진 취약한 국가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최빈국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산업이라고 부를 만한 구조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농업은 소농 중심의 저생산 구조였고, 도시에는 실업과 빈곤이 만연했다. 국가는 외교적으로는 자유진영의 일원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국가를 유지할 실질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 시점에서 국가 운영은 이상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 그 자체의 문제로 전환되고 있었다.
박정희의 5·16 군사행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5·16은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절차를 따른 정권 교체가 아니었으며, 헌정 질서를 중단시킨 군사 개입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당시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무기력한 정치, 무능한 행정, 그리고 국가적 빈곤—에 대한 급진적 대응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스스로를 혁명 세력으로 규정하며, 기존 정치가 해결하지 못한 국가 생존의 문제를 군사적 결단으로 돌파하려 했다.
5·16 이후 박정희 정권이 집중한 것은 이념 경쟁이나 정치적 정통성의 확장이 아니라, 철저히 경제와 산업이었다. 국가는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으로만 존재할 수 없었고, 실제로 먹고살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공화국은 공허한 껍데기에 불과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정확히 인식했고,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개발 기계로 전환시키는 선택을 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 수출 중심 산업 전략, 국가 주도의 자원 배분은 모두 이 생존 논리에서 출발했다. 국가는 시장을 대신해 방향을 정했고, 민간 자본을 조직했으며, 때로는 강압적으로 동원했다. 이는 자유주의적 경제 질서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당시의 조건에서는 선택 가능한 대안이 극히 제한된 상황이었다. 박정희 체제에서 국가는 기업가였고, 기획자였으며, 때로는 채권자이자 감독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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