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호칭에 담긴 제국의 지도
유럽의 귀족 체계는 마치 거대한 바다와 같다. 표면은 평온해 보이지만, 그 깊은 곳에는 역사의 조류와 권력의 파도가 숨 쉬고 있다. 이 글은 하나의 호칭이 품고 있는 언어적 계보, 역사적 맥락, 정치적 관계, 그리고 유럽 각국의 신분 체계라는 네 가지 차원을 탐구한다.
때때로 단어 하나가 그 단어를 둘러싼 음성과 맥락, 사람의 표정과 감정이 함께 어우러질 때 그 자체로 작은 문이 되어, 전혀 다른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Baroness’—그 단어가 내게 처음 다가왔던 순간이 바로 그랬다.
2년 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하는 국제 분쟁조정가 제레미 랙과 두 시간가량 인터뷰를 나누던 자리였다. 그는 스위스, 영국, 미국, 이스라엘 국적을 모두 가진 다중시민권자이자 변호사, 벤처투자자, 창업자로 법과 감정, 문화와 조정을 넘나드는 흥미로운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이야기가 무르익던 중, 그는 문득 “바로네스 수잔”과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다. 말투에 묘한 존경과 애정이 묻어 있었고, 나는 무심코 “귀족 작위겠지”라고 넘기려다 다시 귀 기울이게 되었다. 그녀는 단순한 귀족이 아니라, 신경과학자 수잔 그린필드, “Baroness Susan Greenfield”라는 인물이었다.
이름과 직업, 작위와 과학이라는 낯선 조합.
그날 저녁,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녀의 이름을 검색했고, ‘Baroness’라는 단어가 단지 귀족 호칭이 아니라, 언어와 권위, 번역과 정체성의 무늬가 얽힌 복합 기호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다시 만나게 된 이름이 ‘Baroness Krüdener’였다. 작위, 언어, 역사, 문학, 그리고 신비주의—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단어 하나가 얼마나 깊은 세계를 품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Baroness’라는 단어는 어느새 내게 하나의 계급 호칭이 아니라, 언어적 기원이자 문화적 흔적, 그리고 제국이 그려온 지도 위에 새겨진 기호의 입구가 되었다.
이 글은 그 입구를 지나 작위라는 이름 아래 펼쳐진 유럽의 언어 정치학과 호칭이 품은 제국적 권위의 뿌리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한 귀족 여성의 이름에서 시작된다.
(Jeremy Lack과 Baroness Susan Greenfield, 그리고 제레미가 이야기했던 에피소드는 이 글 말미에 참고 1 참조).
바로네스 바바라 율리아네 폰 크뤼드너(Baroness Barbara Juliane von Krüdener). 그녀의 이름 앞에 붙은 'Baroness'라는 단어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처음엔 단순히 '귀족 여성'의 수사적 표현처럼 보이지만, 자꾸 생각하다 보면 이상해진다. 이건 영어인데, 그녀는 독일계다. 그런데 왜 'Baroness'라고 부를까? 독일에는 그런 단어가 없는데.
게다가 영국에도 'Baronet'이라는 게 또 따로 있다. 그럼 바로네스는 바로넷의 여성형인가?
이렇게 하나의 이름에서 출발한 궁금증은 점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이 된다. 호칭 하나에서 시작한 이 탐구는 결국 우리를 언어, 역사, 정치, 제국의 복잡한 관계망 속으로 인도한다.
* 개념 지도: 이 글은 하나의 호칭에서 시작하여 유럽 귀족 체계의 네 가지 차원을 탐구한다.
① 언어적 계보(라틴어→프랑스어→영어),
② 역사적 맥락(발트 지역의 독일 식민화),
③ 정치적 관계(러시아 제국과 발트 귀족),
④ 신분 체계(유럽 각국의 귀족 작위 체계)
그녀는 실제로 유럽 귀족이었다. 남편은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이자,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인 'Freiherr von Krüdener'였다. 이 'Freiherr'는 독일어로 '자유로운 영주'라는 뜻의 정식 귀족 작위로, 영어로는 관습적으로 'Baron'으로 번역된다.
그래서 'Baroness Krüdener'는 단순한 별칭이 아니라, 남편의 독일 귀족 작위를 영어로 번역한 호칭이다.
Freiherr라는 독일 귀족 작위는 귀족 계급 중 가장 낮지만, 실질적으로는 영지를 가진 독립 영주를 뜻한다. 'Herr(영주)' 앞에 붙은 'Frei(자유로운)'는 이들이 상급 영주에게 종속되지 않은 독립 귀족이라는 자긍심을 의미한다.
그런데 영어에는 'Freiherr'에 딱 맞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귀족 작위 체계상 가장 유사한 'Baron'이 번역어로 선택되었다. 이건 의역이며 기능적 대응이다. 그렇게 'Freiherr von Krüdener'는 영어로 'Baroness Krüdener'가 되었다.
(남편은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이었는데, 러시아가 독일 귀족 작위를 인정했다고?)
18세기 이후 러시아 제국은 발트 지역(오늘날 에스토니아·라트비아)의 독일계 귀족들을 제국 내로 흡수하면서, 그들의 언어·법률·작위 체계를 인정했다.
이들은 러시아 제국 안에서 자치적인 특권을 유지했으며, 황제에게 충성하는 조건 아래 'Baron', 'Count' 등의 작위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는 정복자가 피정복자의 문화를 존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역 엘리트층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귀족회(Adelskorporationen)라는 자치 기구를 통해 내부 질서를 유지하고 특권을 보호했다. 이 기구는 귀족 가문의 성원권과 결혼 규칙, 교육 체계를 관리하며 지역 정치와 경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니 남편의 'Freiherr' 작위는 러시아 제국이 공적으로 인정한 귀족 작위였고, 크뤼드너는 이에 따라 실제 'Baroness'가 되었다.
발트 독일 귀족은 중세 십자군 시대에 동유럽으로 이주한 독일계 귀족과 상인, 성직자들의 후손들이다.
12~13세기, 교황청의 인가를 받은 독일 기사단(Teutonic Order)과 리보니아 기사단은 '이교 지역'으로 간주된 발트해 동부(오늘날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일대를 정복하며, 이 지역에 독일계 정착민들을 이주시켰다.
이들 정복자 집단은 원주민(핀우그르계, 발트계 농민)을 지배하며 독일어, 루터교, 독자적 봉건 질서를 갖춘 귀족 공동체를 형성했다. 독립적인 법률과 교육 제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토지 소유권과 사법권, 세금 징수권까지 행사했다.
16~18세기 동안, 발트 지역은 스웨덴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지만, 발트 독일 귀족은 각 정권과의 협상을 통해 자신들의 언어(독일어), 종교(루터교), 법률(게르만 법), 교육(귀족 학교와 대학 진학권), 작위 체계('von', Freiherr, Graf 등)를 유지했다. 이는 일종의 '제국 내 독립국가' 같은 위상이었다.
18세기 북방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병합한 이후에도, 발트 귀족은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자기 정체성과 권력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러시아는 이들을 행정적으로 적극 활용했고, 특히 외교관, 군인, 법관, 행정관료로 등용했다.
덕분에 발트 귀족은 제국 안에서도 가장 안정적이고 영향력 있는 외래 귀족 계층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발트 귀족의 생존 전략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충성의 방향을 조정하되, 내부 자치권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발트 독일 귀족들은 다른 정복당한 귀족들과 달리 자치 기구와 법률을 통해 집단 정체성을 유지했다. 이들은 지역 엘리트로서 원주민과 제국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으며, 이런 지위 덕분에 19세기말 러시아화 정책이 시행될 때까지 약 700년간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Baron은 사실 영어가 아니다. 'Baron'은 고대 프랑스어 baron에서 유래했고, 이는 다시 라틴어 barō (강한 자, 봉신)에서 파생되었다. 이 단어는 중세 프랑스 봉건제에서 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봉토를 받는 하위 귀족, 즉 '봉신'을 의미했다.
이 단어가 노르망디공 정복왕 윌리엄의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영국으로 유입되었고, 윌리엄 1세가 프랑스 귀족 체계를 잉글랜드에 이식하면서 영국 제도 내 'Baron' 작위가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Baron'은 영국 귀족 체계에서 가장 낮은 작위이지만, 진짜 귀족(Peerage)이다.
<용어 설명: Peerage(피어리지)>
피어리 지는 영국의 공식적 귀족 계급 체계로, 상원(House of Lords)에 참석할 권리를 가진 귀족을 의미한다. Duke(공작), Marquess(후작), Earl(백작), Viscount(자작), Baron(남작)이 포함되며, 세습 귀족(hereditary peers)과 종신 귀족(life peers)으로 나뉜다. 피어리지에 속한 이들만이 'Lord'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다.
여기서 사람들이 가장 혼동하는 작위가 바로 'Baronet(배러닛)'이다. 얼핏 Baron과 비슷해 보이지만, Baronet은 귀족이 아니다.
1611년, 제임스 1세는 아일랜드 식민 정복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부유한 평민 계층에게 돈을 받고 세습되는 기사 작위를 팔기 시작했고, 이것이 'Baronet'이다. 이 작위는 상원에 참여할 수 없고, 'Lord'라는 호칭도 쓰지 않으며, 단지 'Sir'라는 명예적 호칭만 사용한다.
어원으로 분석하면 Baronet의 “-et”은 프랑스어 접미사, ‘작은 ~’ 혹은 ‘~의 아류’라는 의미다. 따라서
Baronet은
문자 그대로 “꼬마 Baron”이다.
이는 유럽 귀족 체계의 복잡한 얼굴을 보여주는 사례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는 작위라도, 그 역사적 기원과 사회적 의미는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작위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권력과 부, 정치적 영향력의 상징이다.
<Baronet의 여성형 ‘Baronetess’>
Baronet의 여성형은 ‘Baronetess’이지만, 역사적으로 극히 드물게 사용되며 거의 제도화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Baronet의 아내는 단순히 ‘Lady + 성’ 형태로 호칭되며, 직접 Baronet 작위를 받은 여성은 영국 역사상 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Baronetess는 존재하는 호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고, Baronet이라는 작위 자체가 남성 중심으로 유지되며 여성은 통상적으로 ‘Lady’로 불린다.
<남편 Baron이 사망한 이후 Baroness>
남편이 귀족 작위를 가진 경우, 그 아내는 ‘Baroness’와 같은 호칭을 부여받지만 이는 법적 작위가 아니라 사회적·명예적 지위에 해당하며, 남편 사망 후에도 일반적으로 그 호칭은 계속 유지된다.
바르바라 크뤼드너는 남편이 가진 Freiherr 작위에 따라 Baroness로 불렸고, 남편이 1802년 사망한 이후에도 ‘Baroness Krüdener’라는 이름으로 사교계와 문학계 활동을 이어갔다. 단, 작위의 실제 보유권과 세습권은 남편의 후계자에게 넘어가며, 그녀는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서의 외적 호칭만을 지속한 것이다.
유럽 각국은 독자적인 귀족 체계를 발전시켰으며, 이는 그 나라의 역사와 정치적 맥락을 반영한다:
(1)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Duc(공작), Marquis(후작), Comte(백작), Vicomte(자작), Baron(남작) 등의 체계가 있었으며, 혁명 이후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나 문화적으로는 계속 사용됨
(2) 스페인: Grande(대귀족), Duque(공작), Marqués(후작), Conde(백작), Vizconde(자작), Barón(남작) 체계가 있으며, 현재까지도 국왕이 작위를 수여함
스페인 드라마를 보면 백작을 말하는 Conde(꼰대)가 자주 나온다. 그래서 웃음을 잘 낸다.
(3) 이탈리아: 지역별로 다양한 귀족 체계가 존재했으며, Duca(공작), Marchese(후작), Conte(백작), Visconte(자작), Barone(남작) 등의 작위가 있음
(4) 러시아: 표트르 대제가 서유럽식 작위 체계를 도입하여 Knyaz(공작), Graf(백작), Baron(남작) 등의 작위가 사용되었고, 14등급의 관직 체계와 연결됨
(참고 3 상세 정리 비교 도표 참조)
이러한 다양한 작위 체계는 유럽의 귀족 문화가 국경을 넘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각자의 독특한 발전 경로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마치 같은 바다에 뜬 여러 개의 섬처럼, 공통된 기원에서 출발했으나 각기 다른 모습으로 진화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는 귀족 작위가 여전히 존재한다. 영국에서는 상원(House of Lords)의 일부 의석이 세습 귀족에게 할당되어 있으며,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 등에서도 국왕이 새로운 귀족 작위를 수여할 수 있다.
발트 국가들에서는 소비에트 시대에 귀족 제도가 폐지되었지만, 1991년 독립 이후 일부 역사적 귀족 가문들이 문화적 협회를 결성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서는 발트 독일 귀족들의 건축물, 성, 저택이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또한 '폰(von)', '드(de)', '반(van)' 같은 귀족 성씨의 접두사는 오늘날 많은 성씨에 남아있어 과거 귀족 체계의 언어적 유산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귀족 체계의 흔적은 단순한 호칭이나 역사적 유물을 넘어, 국가 정체성과 문화적 다양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기능하고 있다.
하나의 작위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은 단지 신분이 아니라 역사와 제국, 정복과 저항, 언어와 번역의 정치적 흐름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크뤼드너가 Baroness인 이유는, 그녀의 남편이 Freiherr였기 때문이고, 그 Freiherr는 러시아 제국이 발트 귀족의 법을 인정했기 때문이며, 발트 귀족은 독일 기사단의 식민 정복에서 나왔고, 그 작위는 영어로 Baron이라 번역되었고, 그 Baron은 프랑스 봉건제에서 온 것이며, 그 프랑스어는 다시 라틴어에서 왔다.
작은 이름 하나가 품고 있는 것은 결국 제국의 지도다. 하나의 단어 속에 유럽 역사의 거대한 바다가 출렁이고 있는 것이다.
[유럽사람들의 작명법에 대해서는 아래 장하 님의 글에 자세한 설명이 있고, 이 글 작성에 참고했다.]
Jeremy Lack은 스위스 제네바 출신으로 스위스, 영국, 미국, 이스라엘 국적을 가진 국제적 법률가이다.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미국에서 특허소송 변호사로 활동한 후, 다국적 의료기기 기업의 유럽 본사에서 인하우스 변호사로 근무했으며, 현재는 스위스로 돌아와 조정·중재·스타트업·감정 연구를 결합한 플랫폼 LawTech를 운영하고 있다.
기술법과 특허, 분쟁 해결, 감정 기반 커뮤니케이션에 정통하며, 영어·불어·스페인어 등 다국어를 구사하고 온라인 분쟁 조정(ODR)에도 능한 크로스컬처 법률 전문가이다.
수전 그린필드 남작부인(Baroness Susan Greenfield)은 영국의 신경과학자이자 과학 대중화 운동가로, 파킨슨병과 알츠하이머병 등 신경퇴행성 질환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얻었으며, BBC 강연, 과학 저서 집필, 교육정책 참여 등을 통해 대중과 과학의 연결에 크게 기여했다. 그녀는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이자 로열 인스티튜션 소장을 역임하며 과학계와 정치계에서 모두 영향력을 발휘한 대표적인 여성 과학자이다.
그녀는 2001년,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종신 귀족 작위를 부여받아 ‘Baroness Greenfield of Ot Moor’라는 호칭을 얻었으며, 이는 상원을 통해 공적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법적 지위였다. 영국의 종신귀족(Life Peerage)은 총리 혹은 관련 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국왕이 서임하고, 이후 서임서를 통해 공식화되며 상원 의원으로 등록된다. 작위는 세습되지 않지만,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적 발언권과 입법권을 갖는 명예와 책임을 수반한다.
아래는 신경과학 연구 호주(NeuRA)의 전문 서비스 담당 이사인 Carole Renouf와의 Baroness Susan과의 대담 영상으로 그녀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이야기, 연구자, 팀 리더, 생명 공학 회사 설립자, 영국 의회 상원 의원으로서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나는 줌을 통해 2시간 동안 제레미를 인터뷰했고, 그가 경험한 ‘뇌를 둘러싼 조정의 실험’ 이야기는 단숨에 내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 실험은 수잔 그린필드 남작부인(Baroness Susan Greenfield)과의 교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뜻밖에도 “조정인이 사람의 뇌를 조종하려 한다”는 오해를 낳았고, 그가 조정인으로 조정하려 했던 글로벌 기업의 대표들과의 조정이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아래는, 그 오해가 진심으로 뒤집히고, 조정의 본질이 다시 살아났던 그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현재 한국에서 조정은 법원 위주로 진행되는 권위적인 분쟁해결제도이지만, 유럽과 영미의 조정(mediation)은 당사자들의 협상을 촉진시키는 전혀 다른 유형으로 근본적인 분쟁해결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의 조정과는 상당히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그는 신경과학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그가 수행했던 신경과학 기반 조정 실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약 76쌍의 커플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조정과 협상이 뇌에 어떻게 다르게 반응하는지 살펴본 거죠.
fMRI 스캔으로 관찰했는데, 조정에 참여한 쪽에서
보상 회로와 관련된 뇌 부위인 nucleus accumbens(측좌핵)가 더 활발하게 작동했어요.”
* 측좌핵(nucleus accumbens)
전두엽 하부 근처, 시상하부(hypothalamus)와 편도체(amygdala) 사이 연결 축에 위치하며, 뇌의 ‘보상 회로(reward circuit)’의 중심 노드
그는 이 실험을 통해 조정이 단지 말의 기술이 아니라,
감정과 뇌의 상태, 사회적 신뢰 구조에 관한 일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 실험은 수잔 그린필드 남작부인(Baroness Susan Greenfield)과의 교류 속에서 구상되었고,
그는 그녀가 초대한 대학 세미나에서 그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그게 문제의 시작이었어요.
“런던에서 중요한 중재가 있었는데, 남미 대기업의 고위 임원들과 법률팀이 참여하는 사안이었죠.”
그는 회고했다. “그런데 일요일 아침,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그들이 기내에서 신문을 읽었는데, 거기엔 ‘스위스의 조정인이 뇌를 조종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던 겁니다.”
문제의 기사는 며칠 전 BBC 블로그에 올라온 세미나 요약이었고, 그게 스페인어로 번역되며 “뇌를 조작해 조정 결과를 유도한다”는 식으로 과장되었다.
“비행기 안에서 이미 분노가 시작됐죠. 내릴 수는 없고, 조정은 하루 앞인데, 전화를 해서 저를 비난했어요. ‘우리는 당신이 뇌를 해킹할 줄은 몰랐습니다’라고요.”
그는 조용히 제안했다.
“오늘 저녁 식사에만 참석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왜 이런 연구를 했는지 설명드릴게요.”
그날 저녁. 그는 원탁을 배치하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사건 이야기는 금지입니다. 가족, 삶, 취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죠.”
서로의 대학, 가족, 강아지 품종까지 우연한 연결고리가 이어졌고, 그 식사는 모든 걸 바꾸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웃으며 회의실로 들어왔다.
“좋아요, 제레미. 조정 시작하죠.”
“그날 저는 말했습니다. 신경과학은 상대방을 조종하려는 게 아니라, 선택의 여지를 넓히기 위한 도구예요. 결국 조정이란 감정을 해석하고, 사람을 이해하는 일 아닐까요?”
그 조정은 성공적이었다. 처음에는 철수 위기였던 사건이 이틀 만에 극적인 합의로 마무리되었다.
“그날, 제게 조정이란 뇌의 과학이 아니라, 신뢰를 세우는 시간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는 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수잔 그린필드와 함께 했던 그 작은 실험이 결국 저를 조정의 본질로 다시 데려가 준 셈이죠.”
뇌보다 더 복잡한 건 사람이고, 사람 사이를 잇는 건 기술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
2025년 4월 기준, 영국 상원(House of Lords)은 총 854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829명이 실질적으로 의정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종신귀족(Life Peers)이며, 일부 세습귀족(Hereditary Peers)과 영국국교회 주교(Bishops)도 포함되어 있다. 상원의원은 선거가 아닌 국왕의 서임 또는 세습을 통해 임명되며, 법률가, 과학자, 교육자, 외교관, 예술가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로 인해 상원은 사실상 분야별 숙의와 조언을 수행하는 고위 자문기구로 기능하며, 법안을 직접 거부할 수는 없지만 수정하거나 최대 1년간 통과를 지연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역사적으로는 귀족 중심의 정치기관이었으나, 1958년 종신귀족제 도입과 1999년 세습귀족 감축 이후 상원의 성격은 크게 변모했다.
오늘날 상원은 정부 정책에 대한 견제, 법률안의 세부 검토, 공공정책에 대한 위원회 보고 등에서 역할을 수행하며, 하원이 다루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전문성과 안정성을 보완하는 ‘성찰적 의회’로 평가된다.
상원의원들은 다수가 생업을 유지하는 비상임 전문가이기 때문에 입법기관이면서도 정무보다는 자문과 감시 중심의 기능을 수행하는 제도적 완충 장치에 가깝다.
귀족이라는 색안경을 끼지 말고, 기능만 놓고 보자면 상당히 국가 운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집단으로 생각된다.
전통의 실용적인 현대화 사례로 우리나라의 국정 지배구조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