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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죽음과 소설『Valérie』

불완전한 고백, 완전한 기도로 피어나다

by 감각의 풍경

1장. 붕괴의 서곡:

세속적 영광과 내적 허무


1.3 죽음이 쓴 자유의 서문:

남편의 죽음과 문학적 탄생

이 이미지는 휘각(揮珏)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AI 도구를 사용하여 생성되었습니다. CC BY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1) 울타리 무너진 날의 해질녘


1802년 6월 14일,

부르크하르트 알렉시스 콘스탄틴 폰 크뤼드너 남작이 리가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때 러시아 제국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그는

세속적 질서와 귀족적 삶의 상징,

크뤼드너에게 ‘법적 남편’이자 ‘사회적 울타리’였다.



(2) 문학살롱을 떠도는 영혼의 연금술


그러나 그녀는 그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지 않았다.

이미 1791년경부터 그들은 실질적 별거 상태였고,

그녀는 1794년부터 베를린, 바이마르, 파리의 문학살롱과 철학자들의 세계를 떠돌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존재의 언어를 준비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별거 중이던 크뤼드너는

프랑스의 작가 Mme de Genlis, 철학자 슈틸링(Jung-Stilling), 그리고 여성 신비주의자들의 편지를 받아가며 고통, 감정, 신앙, 글쓰기를 분리되지 않은 언어로 새롭게 묶고 있었다.



(3) 사회적 가면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


그녀는 더 이상 단순한 귀족 부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감정 문장’을 만들고 있었고,

그 안에는 이미 『Valérie』의 파편들이 깃들어 있었다.

남편의 죽음은 그런 그녀에게

눈물도 애도도 아닌,

하나의 상징적 구조의 붕괴로 다가왔다.



(4) 이름이라는 감옥에서의 탈출


‘부인’, ‘귀부인’, ‘아내’—

그 모든 이름을 유지하게 해 주던

‘남편’이라는 기표가 사라졌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어떤 이름에도 갇힐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의 죽음은 내게 그를 잃은 일이 아니다."
나는 단지,
나를 구성하던 하나의 껍질이
벗겨졌음을 느낀다.



(5) 상징의 잔해에서 피어난 문학


그녀는 곧 『Valérie』를 완성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남편의 죽음이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라,

죽기 전부터 준비된 진동이,

죽음을 계기로 종이 위로 스며 나온 것이다.


그녀는 말로 사랑하지 못한 존재들,

자신이 부르지 못한 이름들,

그리고 무너지고도 살아남은 감정의 파편들을

한 문장 한 문장으로 길어 올렸다.


남편 부르크하르트 남작의 죽음은

종교적 회심을 일으킨 계기가 아니었다.

진정한 회심은 1804년, 리가에서 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목격한 이후에 찾아온다.



(6) 문장으로 수놓은 영혼의 지도


하지만 남편의 죽음은

그녀가 더 이상 역할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만들어주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누군가의 부인이 아니라,

글을 쓰는 여성,

사유하는 영혼,

그리고 존재의 문장을 준비하는 이가 되었다.



1.4 『Valérie』: 내면의 울림을 기록하다

이 이미지는 휘각(揮珏)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AI 도구를 사용하여 생성되었습니다. CC BY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1) 침묵의 언어

『Valérie』가 담아낸 영혼의 비밀 서신


1803년, 크뤼드너는 익명으로 한 권의 소설을 출간한다. 제목은 『Valérie』


서간체 형식, 도덕적 긴장, 감정의 섬세한 분화, 그리고 무엇보다 고백하지 못한 사랑—


이 작품은 곧 당대 프랑스 귀족사회와 감상주의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소설은 백작부인 발레리를 사랑한 한 남성, 구스타브(Gustave)가 절친 에르네스트(Ernest)에게 보내는 편지(1-33, 37-43),

- 에르네스트가 구스타브에게 보내는 편지(34, 36)

- 구스타브가 발레리에게 보내는 편지(45)

- 에르네스트가 백작에게 보내는 편지(46)

- 백작이 에르네스트에게 보내는 편지(47-48)로 구성된다.



(2) 장미의 향기만 맡은 독자들,

뿌리의 비밀을 놓치다


구스타브는 유부녀 발레리(Valérie)를 사랑하지만,

끝내 고백하지 못하고 죽어간다.

이 감정적 고백은 당시 독자들에게 미묘하고 고결한 사랑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Valérie』는 당대에는 감상주의적 성공작으로 간주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철저히 잊힌 작품이다.

그 이유는 단순히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책이 지닌 상징적 구조를 아무도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1803년 익명 출간 당시, 『Valérie』는

“한 젊은 외교관이 유부녀를 사랑하고, 끝내 고백하지 못한 채 병들어 죽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당대 독자들은 이 작품을 절제된 도덕과 감정의 교양소설로 읽었고, 그 고결한 침묵과 열정의 수사학에 감탄했다.



(3) 침묵의 성당에 울려 퍼진 영혼의 메아리


그러나 이 독해는 이 책이 가진 가장 깊은 차원을 가려버렸다.


『Valérie』는 사실상 자아와 신 사이의 침묵 구조,

그리고 신 앞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마지막으로 붙들고자 하는 존재의 기도문이다.


이 작품은 총 48통의 편지로 구성되며,

그중 45번째 편지는 구스타브가 발레리에게 보내는 유일한 직접 서간이다.


그전까지 모든 편지는 구스타브가 친구 에르네스트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그 안에서 발레리에 대한 감정은 우회되고, 절제되고, 내면화되어 있었다.



(4) 마지막 속삭임, 영원한 고백의 순간


그러나 45번째 편지에서, 그는 마침내 발레리에게 직접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은 바로 죽음 직전의 음성,

더는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폭발이다:


“Je vais donc encore une fois vous parler, Valérie! … Cette voix vous dit enfin que c’est vous que j’aimai… Ah! ne détournez pas de moi ces yeux…”
이제 나는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발레리.

이 목소리는 마침내 말합니다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아, 나를 외면하지 말아요…
그 눈길을 거두지 말아요.


이 문장은 단순한 사랑의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신에게 바치는 마지막 기도이며,

말이 되지 않는 내면의 울림을 비로소 문장으로 붙든 마지막 시도다.


이 구조에서 Valérie는 절대자 신(神)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녀는 언제나 멀고, 고귀하며, 감정의 중심에 있으나, 결코 응답하지 않는다.



(5) 별빛과 인간 사이, 종이배를 띄우다


구스타브는 침묵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의 자아이고,

그는 반복해서 감정을 쓰고 또 쓰지만,

끝내 그 감정은 말로 닿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무응답의 신 앞에서, 말이 끝내 고백으로 도달하는 순간, 그가 외치는 말은 단 하나다:


나는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나를 외면하지 말아요.


이 한 문장은 크뤼드너가 아직 회심하지 않았던 시절,

신의 존재조차 확신하지 못했던 시절,

그러나 신을 부르기 위해 언어를 준비하고 있었던 바로 그 순간의 기록이다.


이 마지막 편지는 실제로 발레리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구스타브는 에르네스트에게 말한다:


“나는 그 편지를 그녀에게 보낼 수 없어.
네가 언젠가 그녀가 읽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그때 건네줘.
그 생각이 내 죽음을 조금은 부드럽게 해 준다.”


이 말은 신학적으로 볼 때,

기도가 신에게 직접 닿지 않음을 알면서도,

누군가의 ‘전달’을 통해, 미래의 언젠가, 어딘가에서 응답받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표현한다.



(6) 불완전한 고백, 완전한 기도로 피어나다


이 희미한 매개자 에르네스트는 독자이자

신과 인간 사이에 가설적으로 존재하는

중보자(mediator)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장면은 『발레리』 전체의 구조적 절정이며,

크뤼드너가 존재의 해체를 말로 붙들 수 있는 마지막 계기를 쓴 것이다.


그녀는 이 책을 쓰며 회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말이 끝나는 지점에서,

신은 도착한다.


그녀는 죽음을 말하며,

사랑을 고백했고,

그 고백이 도달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끝내 문장을 남겼다.


그것이 기도 이전의 기도,

침묵 이전의 언어,

문학 이전의 신비주의다.



(7) 잊혀진 책에서 발견한 영원의 언어


크뤼드너는 이 작품을 통해

신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신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Valérie』는 그래서 침묵의 책이다.

편지로 가득 찼지만,

사실상 말할 수 없었던 것을,

그저 존재의 진동으로 문장화한 글쓰기이다.

당시 독자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19세기 후반 이후 이 작품은 프랑스에서도 읽히지 않았고, 영어 번역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너무 감성적이었기 때문에 외면당했고,

너무 섬세했기에 번역을 거부당했으며,

무엇보다 그 감정이 상징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은 ‘감상적인 실패작’이라는 오명을 쓴 채 잊혔다.

그러나 이 책은 실패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의 한계와 침묵의 울림을 끝까지 밀어붙인 문학적 기도서였다.


크뤼드너는 이 책에서

하느님을 찾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가장 순결한 감정을

말이 되지 않는 언어로 남겼다.


그녀는 사랑했음을 고백했고,

그 사랑이 닿지 않더라도

“나를 외면하지 말라”고 속삭였다.


그것은 기도의 언어가 아니라,

기도가 되기 위한 감정의 탈형식화된 예비작업이었다.

이 이미지는 휘각(揮珏)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AI 도구를 사용하여 생성되었습니다. CC BY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1.5 소설 발레리의 탄생을 예고한

『Pensées et Maximes』(생각과 격언)


『Valérie』에 앞서,

크뤼드너는 『Pensées et Maximes』(1802)라는 명상록을 『Mercure de France』에 발표했다.


이 작품은 짧은 단문들로 구성된 도덕적 성찰의 기록이며, 인간 감정과 고통, 고독, 윤리적 선택의 구조를 섬세하게 사유한 글들이다.


특히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의 층위’와 ‘침묵이 내포하는 윤리적 힘’에 대한 감각은 『Valérie』에서 더욱 감정적으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이 작품은 그녀가 단지 연애 감정을 고백하기 위해 발레리를 쓴 것이 아니라,


감정을 하나의 언어로 구성하고,

고통을 도덕적 사유로 번역할 수 있는 사상적 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소설의 배경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

『발레리』는 크뤼드너의 실제 경험에 크게 기반한 자전적 소설로 알려져 있다. 실제 소설과 유사하게 1780년대 베니스에서 크뤼드너의 남편의 외교 수행원이었던 알렉산더 스타키에프(Alexander de Stakiev)는 그녀에게 연정을 품었다.

이 감정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고, 코펜하겐에서 남작을 섬기던 스타키에프는 1787년에 크뤼드너의 남편에게 자신의 열정을 고백한다. 소설은 이 사건으로부터 10년 이상이 지난 후 집필되었다.

비평가들은 이 소설이 루소와 괴테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당대 문학의 주요 주제들을 차용했지만, 그 기본 줄거리와 감정적 역학은 크뤼드너 자신의 삶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소설은 1803년 파리에서 출판되어 문학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그녀가 종교적 신비주의자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글은 위와 같은 일반적인 설명과 다른 독자적인 가설적 추리에 기반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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