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앞세대를 기리며
어릴 적부터 자주 놀러 간 안동 외갓집은 언덕 위에 있었고 언덕 아래 구불구불한 소나무 밑에는 초록의 깊이가 잘 보이지 않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우물이 있었다. 마당에는 펌프도 있었는데 마중물을 조금 넣고 힘껏 몇 번 펌프질을 하면 물이 콸콸 나오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다. 거기서 200m 위쪽에는 둘째 이모집이 있었는데 밤이 되면 플래시를 들고 이모네 집으로 자러 갔다.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 왼쪽으로는 밭과 논 오른쪽으로는 시커먼 산이 있었고 가다가 폐가도 한 채 있어서 이종사촌 언니와 오빠 팔을 꼭 붙 잡고 가던 기억이 난다. (혼자 간다면 진짜 담력 테스트 코스인 곳이다)
친정엄마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셨다. 나는 전래동화같이 엄마의 이야기를 또 듣고 또 들어도 좋았다.
엄마는 어릴 적 비가 올 때면 먼 산에 도깨비불이 휘휘 도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아무개야 오나 안 오나~" 하는 소리도 들렸다고 한다.
좀 모자란 머슴도 있었는데 떡을 하는 날이면 기분이 좋아 나무 지게 짐을 두세 번씩 날랐다고도 한다. 가끔 칼국수를 한 날 "우리 00은 칼국수 안 좋아하지?라고 어른들이 놀리면 달라고도 못 하고 멈칫하다가 "거 국물만 주소~" 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어른들의 장난이었고 배부르게 먹였다고 한다.
마당에 닭을 풀어놓고 키우셨는데 장난꾸러기 형제들이 놀거리가 없어 구구구구~하고 닭소리를 내면 모이를 주는 줄 알고 몰려왔다고 한다. 그럼 엄마 형제들이 닭을 빤히 보며 "구구 팔십일!"하고 외치면 갸우뚱거리다가 돌아갔다고 한다. 이런 장난을 몇 번을 해도 닭이 속아 왔다가 돌아갔는데 지금 생각하니 미안하네라는 말도 하셨다.
이런 시시콜콜한 엄마 어릴 적 이야기가 예전에는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였는데 나이 들고 보니 어쩌면 나의 뿌리에 대한 이야기로 기록에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부터 친정 엄마에게 자주 전화가 걸려왔다. 할아버지 묘소를 정비한 이종사촌 언니들과 외삼촌 사이에 작은 갈등이 있었다. 고라니가 자꾸 묘소를 헤쳐놓는다는 이유로 미리 상의 없이 묘역에 철망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언니들의 마음도, 외삼촌의 섭섭함도 이해되지만, 이런 사소한 일로도 여전히 우리 가족 모두가 할아버지를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는 걸 느꼈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정말 거짓말 조금 보태어 영국의 처칠수상을 떠올리면 된다. 한국인으로 드물게 에메랄드빛이 도는 눈동자에 흰 피부, 굽실굽실 숱 많은 은발에 크고 줄 뻗은 코, 집념이 있어 보이게 꾹 다문 입 내가 보아도 처칠 수상의 사진과 비슷했고 진짜 그런 말을 많이 들으셨다고 한다. 마을의 훈장(야학선생님 느낌)과 이장으로 까막눈인 청년들을 다 가르쳤고 마을 사람들의 결혼날, 이삿날 등 택일도 해 주셨다고 한다. 엄마 말로는 택일한 날에 한 번도 비가 온 적을 본 적이 없다나... 마을 사람들의 신뢰와 엄마의 아버지의 에 대한 자부심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다.
그전 일제 강점기에는 먹고 살길이 없어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회사원으로 일하셨다 한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라 매실 장아찌만으로 도시락을 싸서 다니셨고, 2차 대전 당시 불비가 내려 하수도에 숨으셔서 똥물을 받아먹으시며 버티셨다고 한다. 실제로 그때 폭격 소리에 미쳐서 돌아다니는 일본 여자를 본 적도 있다고 외할머니가 그러셨단다. 전쟁은 애꿎은 민간인에게 지옥과 같은 시간이었다. (대동아전쟁이라고 늘 하셨는데 1941년 일본 정부가 태평양 전쟁을 지칭하며 사용한 용어로, 아시아를 하나로 묶어 서구 열강에 맞서 싸운다는 뜻 그러나 이 용어는 일제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표현으로, 옳지 않은 표현이라고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들어 이 표현이 익숙하긴 하다. 그때 외할아버지가 일본에 사셨으니 이렇게 들으셨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으로 돌아와 고향 마을인 안동에 자리를 잡고 마을 훈장과 이장으로서 마을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한 가지 일화로는 안동은 삼베가 유명하여 기차를 타고 춘천 장에 가서 팔고 오는데, 어떤 여자가 아이들 안고 구걸을 하고 있더란다. 외할버지는 차비만 남기고 그 여인에게 삼베 판 돈을 다 주고 기차에 올랐단다. 같이 간 친척이 혀를 차며 그 인품에 감복했다고 한다. 엄마는 이런 일화를 말씀하시며 외할버지가 그렇게 덕을 쌓아 9남매(외삼촌 4, 이모 5)가 별 탈없이 잘 자란 거 갔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였고 6.25가 터졌고 안동까지 내려온 북한군은 매일 찾아와 외할버지에게 협조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어느 날 밤, 마을 남자들만 한집에 모여서 몰래 회의를 하고 있는데 북한 군 2명이 총을 들고 들이닥쳤고 이 중 이장이 누구냐고 총부리를 대고 물었다고 한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외할아버지를 가리켰고 이때 외할버지는 바람을 가르는 속도로 냅다 방문을 뛰어나와 무조건 뛰셨다고 한다.
마을 골목을 정신없이 뛰고 있을 때쯤 마침 한 집의 대청마루 뒤에 문이 열려 있었다고 한다. 그때 만약 그 문이 닫혀있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 같다. (그때 엄마는 태어나기 전이었다 엄마는 1953년 8월생이다)
[쳇지피티가 내 설명을 듣고 그려준 그림, 사실 내가 상상하던 그날밤은 더 선명하고 드라마틱하며 절박하다]
대청마루를 거쳐 그 문을 나오니 담벼락이 높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높이였단다. 그런데 마침 보름이라 달이 그렇게 밝을 수 없었단다. 사람이 절체절명의 순간이 오면 기인과 같은 힘이 생겨난다고 하지 않던가?
그 높은 담을 훌쩍 넘었는데 아마 살 운명이셨는지 가깟으로 넘어지더란다. 할아버지는 그 길로 도망을 가서 산속에 숨어 지내셨는데 어느 날은 인민군들이 외할머니와 아이들만 있는 집으로 찾아오셔서 남편 어디 있는지 대라고 했다고 한다.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근데 마침 그때, 이모 중 한 분이 7살도 안 되어 홍역인가 전염병으로 돌아가셨단다. 방 윗목에 죽은 아이를 흰 천으로 덮어 놓고 "이 보시오, 아이가 죽었는데 아비가 안 와서 저렇게 장사도 못 지내고 있는 거 안 보이시오?"라고 하며 천을 벗겨 보여주니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니 외할머니 마음도 말이 아니셨을 거 같다. 남편은 도망 다니고 있지, 아이는 병으로 죽어서 장사도 못 지내고 있지 너무나 가슴 아픈 시절이야기이다.
이 시기에 어떤 이념도 안전하지 못한 시기였다는 것은 다들 잘 아실 것이다. 북한군이 주둔할 때는 이에 반대하는 사람을 색출하여 죽음을 면치 못하거나 후퇴 시 끌고 갔으며, 반대로 북한군이 몰려 올라갔을 때는 북한군에 동조한 사람들은 모두 색출하여 총살을 당하는 시대였다. 6,25 전쟁이 끝나고 정말 북한군에 동조했던 사람들은 모두 조사하여 색출되었고 학교 운동장으로 끌려가셨단다. 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그런 경우도 있었을 텐데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슬로 사라졌다.
북한군에 동조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그날 밤 담을 넘으셨던 외할버지 덕분에 어머니와 나와 자매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지금도 주말 저녁을 오붓하게 보내고 있다. 둘째 아이와 남편은 보드게임 중이고 첫째는 핸드폰 삼매경 중이다. 나는 이렇게 노트북을 켜고 주말을 마무리하며 브런치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직장 5년 차 가을쯤 외할버지 부고를 들었다.
집안마다 그런 경우가 많은데 어떤 아들은 해외에 살고 몇째 아들은 아내가 아프고 등등 이유로 어떡하다 막내 외삼촌이 외할버지를 모시게 되었다. 착한 외숙모가 따뜻하게 세끼 밥을 꼬박꼬박 잘해 드렸고, 가끔 자식들 집에도 방문하셨다. 내가 고3일 때 우리 집에도 오셨는데 안방 침대에 모시자니 불편해하셔서 거실에 이불을 깔고 주무시던 외할버지가 떠오른다.
우리 강아지가 할아버지가 낯설어서 살금살금 다니는 걸 보시고, 다 빠진 이로 아기처럼 허허 웃으시고, 80세 가까이 되셔도 풍채가 좋으셨는데,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깡마른 노인이 누워계셔서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래도 나이가 드셔서 먹는 양도 줄고 그래서 그런 거 같다. 그때 죽음이라는 것을 실제로 목격하고, 그때부터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거 같다. 부모님도 나도 죽을 때 모습은 그런 모습이겠거니 하며...
그 당시 3일장을 치르고 장례버스가 출발해서 한참을 가는데, 외할버지를 모시던 외숙모가 어쩌다 못 탄 걸 알게 되었다. 차에 탄 사람들이 그럼 다른 차를 타고 따라오게 하라 했지만 외삼촌이 "안 돼, 차 돌려, 데리고 와야 돼!" 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10여 년 넘게 시아버지를 모시던 아내를 존중하던 외삼촌이 그때 정말 멋있어 보였다. 비록 누군가는 참 별나다 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나의 막내 외삼촌에 대한 지지와 존경은 이런 외삼촌 내외 분의 희생이 뒷받침된 거 같다. 나도 시누이가 많은 며느리 입장이라 올케인 엄마에게 가끔 막내 외숙모에게 잘하라고 훈수를 놓기도 하면 엄마가 알겠다며 웃기도 하신다.
곧 있으면 현충일이다. 선거일에 현충일 연휴까지 겹쳐 여행 계획을 세운 분들도 있고, 아이들도 노는 날이 많다고 좋아한다. 현충일에 내가 지키는 일아 꼭 2가지 있는데 조기 다는 것과 10시에 사이렌이 울릴 때 묵념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꼭 지도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비록 놀러 가거나 다른 곳에 가더라도 미리 조기를 달고 가고 거기서 사이렌이 울리면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한 많은 분들을 위해 꼭 묵념하라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애썼던 독립투사들, 6.25 때 우리를 도와준 UN군들, 학도병과 군인들, 그리고 전쟁이 무언지도 모르고 끌려 나왔다가 희생된 저 북쪽 어린 청년들(그래도 우리는 한민족이니까),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억울하게 희생된 많은 사람들 그리고 올해는 잊고 있었던 외할버지도 영면하시길 빌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