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열에 시달렸다. 침을 넘기기도 힘들었는데 목구멍에 생선가시가 박혀 있는 것처럼 아팠다. 학교는 삼일째 결석이다. 무엇보다 간신히 기어 다닐 정도로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힘들다. 머리맡에 일주일치 약봉지가 놓여 있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물수건으로 열을 빼내 줄 아빠였다.
아빠는 하루 종일 바빴다. 특히 명절 밑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다. 손끝에 달린 가위가 부스스한 덤불 같은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나면 마법이 일어난 것처럼 손님은 변해 있었다. 변신한 사람들의 모습이 신기해서 아빠의 일터에 가는 게 재미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학교가 끝나면 그곳을 항상 지나갔다.
창문 너머 아빠의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 눈빛이 마주쳐 싱긋 웃어주는 미소와 공중을 향해 세리머니처럼 가위질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 집으로 향했다. 아빠가 오기 전까지 혼자 숙제를 하고 저녁을 챙겨 먹고 멍하니 처마 끝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들을 보냈다.
그때 본 하늘은 유난히 맑고 푸르러 보는 내내 눈이 아팠다. 백로가 지나 스산한 바람 기운이 겨드랑이를 쓸고 지나갔다. 아빠 말고도 누군가를 기다렸는지 학급에 돌고 있던 감기를 옮아 열이 나고 있었는데도 대문 쪽만 바라보며 떨고 있었다.
-은영아
젖은 물수건이 이마에 놓임과 동시에 환청처럼 아빠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아파?
간신히 눈을 떠보니 아빠가 보였다. 측은하게 내려다보는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왜 자꾸 아프냐?
아빠의 손이 분주하게 물수건을 갈아가며 열을 빼내고 있었다. 일을 내팽개치고 온 게 분명했다. 빨리 가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떼어지지 않는다. 혓바늘과 구내염이 입안에 그물이 친 탓에 말은
목구멍을 나오다 옴짝달싹 잡혀버렸다.
-너 좋아하는 것 사놨어. 얼른 먹고 나아.
내가 좋아하는 것이 특효약이었다. 이 약은 나의 태몽에서부터 등장한다. 사과나무 옆을 할머니가 지날 때 유난히 빨간 사과가 가방 속으로 툭 떨어졌다고 했다. 직접 딴 것이 아니라 얻은 것이라 아들이 혼자되고 손녀가 외롭게 크는 거라며 눈을 감기 직전까지 재수 없는 꿈이라며 원망했다.
아빠의 마법 손 효험 덕분에 열은 줄행랑치듯 사라져 갔다. 기운을 차려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 눈앞을 꽉 채운 것은 빨간 사과가 가득 담긴 궤짝이었다. 허겁지겁 대충 씻어 한입 베어 물었다. 방금 전까지 괴롭혔던 열이 사과 꿰짝으로 도망친 마냥 빨간빛이 짙었다. 씹히는 소리와 신맛 그리고 단맛이 온몸에 퍼져 나갔다.
빨간 사과 궤짝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책가방 안에는 특효약이 하나씩 넣어졌다. 급식을 먹고 난 후 운동장 벤치에 앉아 한 입씩 베어 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아한 하늘이 내 우주 같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