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이도 존재하는 삶에 관하여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되는 질문
삶은 꼭 의미가 있어야 하는 걸까.
그 질문이 떠오르고 난 뒤로, 나는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오랫동안 삶을 설명해야 한다고 믿었고,
지금의 나를 이해해야 제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이런 생각이 든다.
살았으니까 그런 일이 있었던 거겠지.
그리고 그 말 뒤에
나는 처음으로 숨을 길게 쉬었다.
놓으라는 말조차 집착일 수 있다
예전엔 붙잡는 나를 싫어했다.
흘려보내는 게 성숙이고,
잊는 게 성장이고,
넘어가는 게 자유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보니
놓으려는 마음조차 잡고 있었다.
그 집착을 인정한 뒤에야
조금씩 느슨해졌다.
붙잡는다고 틀린 게 아니고, 놓아진다고 맞는 것도 아니다.
그건 그냥 내가 살아온 방식의 모양일 뿐이었다.
완성된 ‘나’는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다
한때는 완성된 나를 꿈꿨다.
흔들리지 않고,
갈등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나.
하지만 그 이상은
또 하나의 “되어야 하는 나”가 되어
오히려 나를 좁혔다.
깨달음도 욕망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나는 조금 덜 집착하게 됐다.
그걸 안다고 삶이 쉬워진 건 아닌데,
그래도 이상하게 조금 덜 목이 졸렸다.
두 감정이 공존하는 것도 살아 있음의 증거다
아침엔 살아보고 싶고,
밤엔 그냥 사라지고 싶다.
그 감정 중 어느 쪽이 진실인지를 따져 묻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둘 다 나다.
둘이 싸우는 게 아니라
그저 번갈아 지나가는 파도 같은 것이다.
진심은 하나가 아니라, 순간마다 다른 얼굴로 온다.
그걸 인정하자,
조금 덜 괴로웠다.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도 하나의 방식이다
지금 나는 의미 없이 존재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무기력과 무의미는 같지 않다.
전자는 힘이 없는 상태고,
후자는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상태다.
그 차이를 알게 되자
살아지는 나를 미워하는 힘이 조금 줄었다.
살아지는 것도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다.
그리고 오늘은 그걸로 충분하다.
존재 자체가 기록이라면, 의미는 나중에 붙어도 늦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적어둔다.
의미가 없어도 존재할 수 있다면,
그 존재하는 나로 충분하다.
완성되지 않아도 되고,
정리되지 않아도 되고,
설명되지 않아도 된다.
오늘 살아졌다면, 그건 실패가 아니라 흔적이다.
내일은 모르겠다.
근데 모른다고 해서 잘못된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