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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번째 별

무언가를 원하지 않는다는 감정에 대하여

by IRIS
열망이 사라진 자리

언젠가부터였다.
무언가를 꿈꾸거나, 이루거나, 잡아야 한다는 마음이

천천히,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꺼졌다.

예전의 나는
이걸 실패라고 불렀을 것이다.

지금은 그냥 이렇게 생각한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히 살았다. 조금 쉬어도 된다.

욕망이 사라지는 순간은 멈춤이 아니라 — 비워짐일지도 모른다.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굳이 일 뿐

사실 난 의지가 없는 게 아니다.
그냥 이젠 설득하고 싶은 사람도, 증명하고 싶은 대상도 없다.

예전엔 선택이 전투였는데
지금은 그냥 반응이다.

좋으면 움직이고,
싫으면 멀어진다.

생각보다 단순한데
살다 보니 단순해지더라.

해야 해서 하던 삶에서, 할 수 있을 때 하는 삶으로 내려온 것일지도.


욕망 없는 나를 인정하는 일

나는 한때
욕망을 잃은 나를 혐오했다.
의욕 없는 인간이 가장 보기 싫었으니까.

근데 이제 알겠다.
나는 의욕이 없는 게 아니라, 예전의 방식에 질린 거다.

나를 바꾸려는 노력 대신
그냥 이 상태의 나를 구경하는 쪽이 조금은 덜 지치더라.

바뀌지 않는다고 해서 머물러 있는 건 아니다.


욕망이 사라지면 남는 것들

웃긴 건,
욕망이 줄어드니까
내가 원했던 것들의 정체가 드러난다.

"잘되고 싶다"는 말속에는
사실 ‘잘 보이고 싶다’가 있었고,
"늦지 않았다"는 말엔
‘남들이 말하는 기준에선’이 숨어 있었다.

지금은 그냥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솔직히, 이제 그 기준에 끌려다니기엔 내가 좀 지쳤다.

욕망이 줄어드는 건 비극이 아니라 — 해석의 끝이다.


빈 공간을 불안해하지 않는 연습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는 허전하다.
예전 같았으면 그 빈 곳을 목표로 다시 채웠을 거다.
근데 이제는 그냥 비워둔다.

불안하긴 한데,
이 정도 불안은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괜찮다.

텅 빈 공간에도 숨은 있다.


원하지 않는 지금도 살아진다

그래서 지금 나는
삶을 관리하지 않는다.
잡지도 않고, 밀지도 않고,
이유도 붙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지고 있다.
그게 이상하게 — 너무 자연스럽다.

원하지 않아도 — 나는 여전히 살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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