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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번째

살아진다는 감각

by IRIS
힘을 빼도 괜찮다는 걸, 시간이 조금씩 알려주었다


요즘 나는 삶을 예전처럼 몰아붙이지 않는다.

그건 철이 들었다는 의미라기보다, 살다 보니 자연스레 몸이 배운 속도에 가깝다.

한때는 계획이 흔들리면 일상이 무너질 것 같았고,

쉬는 건 곧 뒤처지는 일처럼 느껴지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다르게 안다.

붙잡지 않아도 굴러가는 일들이 있고, 무리하지 않아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흐름이 있다는 걸.

이걸 깨달았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느긋한 사람이 된 건 아니다.
다만,
삶의 방향을 굳이 손으로 밀지 않아도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이젠 조금 인정하게 된 정도다.

어른이 되고 나니, 힘을 주는 일보다 힘을 빼는 일이

어쩌면 더 어려운 기술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 기술을 이제 천천히 배워가는 중이다.


선택을 가르는 기준이 단순해졌다

나이가 들수록 선택이 가벼워지는 순간이 있다.

예전에는 선택 하나에도 수많은 이유를 붙였고
뭔가를 고르면 반드시 ‘옳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다.
이유보다 내가 버틸 수 있는지, 괜찮은지가 먼저다.

그래서 요즘 나의 기준은 단순하다.

굳이 힘들게 가지 않는다.
굳이 벅찬 자리에 서지 않는다.
굳이 나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선택은 가벼워졌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사라진 건 아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정확해졌다.
과장된 목표 대신
지속 가능한 방향을 고르는 쪽으로 변했으니까.

아마 이것도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 하나일 것이다.
빠르게 가는 것보다
버티며 가는 게 중요해지는 나이가 되었으니까.


증명에서 벗어나니, 나에게 남는 자리들이 있다


한동안 나는
무언가를 이루지 않으면 허전했고,
결과를 내지 않으면
내가 멈춰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시절도 나쁘지 않았다.
그 덕에 버틴 날들도 있었고
그 방식으로 배운 것들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이제 나는 누구에게 보여줄 필요 없는 자리를 조금씩 만들고 있다.

성과가 없다고 해서
내 삶이 덜 살아지는 건 아니고,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도
충분히 나를 앞으로 데려간다는 걸 알게 됐다.

증명에서 내려오니 남는 게 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비워두었던 자리들에
비로소 나를 채울 수 있게 된다는 것.

그게 요즘의 나를
조금 더 가볍게 만든다.
조금 더 편안하게도 만들고.

어른이 된다는 건
큰 깨달음이 아니라 이런 작은 변화들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작은 변화들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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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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