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K
'이대로 있으면 큰일이다'
한없이 비가 쏟아져 내리던 밤, 그는 침대에 누워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요즘엔 불면증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찾아오는 가벼운 수면 장애정도로 여겨지지만 그에게는 특별하게 잠들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방금 전까지 침대에 함께 누워있던 고양이가 떨어져 아파했지만, 그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고양이가 아프다는 걸 '이해'했지만, '공감'할 수 없었다. 공감과 이해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사실 그가 처음부터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보통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스퍼거 증후군'이거나 소설 <아몬드>에 나오는 '알렉시티미아(감정표현불능증)'이었다. 하지만 그는 선천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직업은 심리상담사였다. 애초에 그가 이 직업을 선택한 것도 타인에 대한 감정을 감지하는 능력 때문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는 타인의 감정을 감지하는데 능했다. 어떤 상황에서건 그는 타인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지금 어떤 감정인지 잘 캐치했고, 그래서인지 그에게 종종 상담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자주 찾아왔다. 그는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보듬어주곤 했다. 심리 상담사라는 직업은 그에게 천직처럼 느껴졌다. 별 고민 없이 직업을 택했고, 심리상담사로서 순탄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심리상담사라니.. 상담이라도 받아야 하나?'
하지만 그는 병원이나 상담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심리 상담사가 상담을 받는다는 소문이 돈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줄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자 속이 메슥거렸지만, 달리 착잡해진 마음을 달래줄 방법을 찾지 못했다.
며칠 쉬면 나아질까 싶어 연차를 쓰고 일주일을 쉬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리고 내일은 미뤄뒀던 상담 예약이 빠질 틈 없이 잡혀있었고, 더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채로 터벅터벅 상담 센터로 향했다. 컨디션은 최악이라, 가짜로 꾸며내는 것도 힘들 거 같았다.
결국 그는 상담실 안에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저기.. 미안한데, 오늘 상담 다 취소해줄 수 있을까?"
"네? 선생님, 오늘은.."
"알아.. 아는데, 내가 오늘은 진짜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그래"
"저.. 선생님 그러면 일단 지금 와서 기다리고 있는 분이라도 해주실 수 없을까요? 도저히 돌려보내기가 힘들어서.. 나머지 분들은 취소 전화 돌려볼게요"
".. 알았어 들여보내 줘"
한 명이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야. 할 수 있어. 해보는 거야. 그는 중얼거리며 자신을 다독였다. 똑. 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철컥, 하고 방문이 열리자 어느 한 여자가 상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다크서클이 내려와 눈이 퀭한 상태였다. ‘쉽지 않겠군’ 그는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어떤 일로 오셨죠?"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손을 꼼지락거렸다.
"괜찮으니 준비가 된다면 말씀하세요, 차라도 드릴까요?"
그녀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는 테이블 위에 있는 포트의 버튼을 눌러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적과 고요함이 가득했던 방안에 부글부글 물이 끓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소리가 어색한 침묵을 깨자, 그녀도 말할 용기를 얻었는지 천천히 입술을 떼고 몇 마디 말하기 시작했다.
"저기.. 실은...."
그녀는 말을 멈췄지만, 그는 오랜 상담 경험 끝에 그녀를 닦달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자, 그녀가 다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제가 몇 주 전부터, 감정이 없어진 거 같아요"
"네?"
"아니.. 그게 정확히는 없어졌다기보다는 메마른 건지.. 잘 모르겠는데, 누가 뭘 말해도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이 안 들어요"
그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서 요즘 누가 힘들다고 해도.. 공감을 못하니까 딴 소리만 하고, 그래서 친구들도 점점 제가 이상해졌다고 하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녀를 바라봤다. 그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는 답이 없자 내심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저 같은 사람을 사이코패스라고 하나요? 저 혹시 뭐가 문제가 생긴 걸까요? 어떻게 하죠 선생님?"
"아뇨.. 그게.. 음.. 저 혹시 점심에 시간 괜찮으세요?"
"네? 그게 무슨.."
"아.. 저도 상담사로서 이러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저도 실은 비슷한 일을 겪어봐서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그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어쩐지 그녀에게 공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