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희야. 너네 이모 죽는다. 빨리 해 줘. 이모가 꼭 갚는다잖아."
"엄마 사위가 알면 난리 날 일이야. 보증은 부모도 안 서준다잖아"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면 너한테 부탁도 안 해. 이년아. 차 서방 알기 전에 해결해 줄 거야"
엄마의 목소리가 순간 높아졌다 금세 사그라진다.
엄마의 형제애가 이렇게 두터웠던가? 엄마의 이타심은 다른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엄마가 이모의 일로 석희를 찾아왔다. 석희 이름으로 산 작은 집을 담보로 보증을 부탁하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엄마의 일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부탁을 하는 걸까
"내 엄마 맞아? 나를 먼저 생각해 줘야지. 무슨 이모 집안일까지 내가 신경 써야 해? 난 다 안 보고 살아도 괜찮아 엄마나 잘 살 생각 해. 엄마 힘들 때 이모가 뭐 도와준 거 있어?"
"하정이도 아직 어린데, 막을 수 있으면 막아야지"
석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하!"
속으로 삼키는 외 마디 한숨만 나온다.
"하정이가 뭐가 어려 24살이면 지 앞가림은 하지. 너무 곱게 키웠으니까 그게 문제지"
'엄마는 내 나이 그 또래일 때 빚쟁이 손님을 줬잖아'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다.
이모는 엄마와는 결혼의 시작이 달랐다.
무작정 사람하나 좋아서 아빠를 따라나선 순정적인 엄마와는 달리 이모는 일명 마담뚜의 소개로 이모부를 만나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하였다. 시작이 다르니 삶이 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석희가 자라면서 본 엄마와 아빠는 항상 동등했다. 두 분의 대화는 자유로웠고. 서로 도왔다. 하지만 이모부는 왕처럼 굴었다. 이모부의 말 한마디면 이모는 바로 움직였다.
"재떨이 어디 있지?"
"여기요"
"저녁은 수제비 해 먹자"
"준비할게요"
싫은 내색 하나 없는 이모의 얼굴은 평온하지만 어둡다. 경직되어 있는 이모집의 분위기를 석희는 낯설어했다. 돈이 삶을 꼭 행복으로 이끌지는 않았다.
이모부는 중국집을 운영하면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직장 한번 다니지 않은 이모는 곱고 고급스러웠다. 생활의 수준은 높았고 아이들의 교육에도 열심히였다. 어린 시절 석희는 이모집에 놀러 갈 때면 자신이 이모의 딸이라면 어떨까 라는 상상을 종종 하곤 했다. 하지만 이모부의 딸인걸 상상하는 것은 별로였다. 이모의 외동딸 하정이가 부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여름이면 넘쳐나는 과일이 냉장고 안에 가득하고 겨울이면 온 집안이 따뜻한 온기로 푸근하다.
석희네 방 하나짜리 집에선 과일은커녕 빈 냉장고가 들어갈 자리도 없었다. 장판이 까맣게 그을린 아랫목만 따뜻한 외풍 심한 방.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다정하게는 보였을 듯 하지만 깔아놓은 담요 밖은 추웠다. 석희. 석영이와는 달리 하정이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고. 할 수 있었다.
중국집을 그만둔 이모부는 관광버스 사업을 하셨고. 그 또한 잘 되는 듯 보였다.
이모부는 많은 돈을 빌려 땅을 사고 건물을 지었다.
건물을 밭 한가운데 지어질 예정이어서 필요한 자재를 옮기는 도로를 만드느라 주변의 필요 없는 땅까지 사들여야 했다.
"박사장. 거기 주변 다 아파트 들어올 거야. 그럼 먼저 들어가서 자리 잡고 있는 게 좋지. 월세를 받으면 노후에 얼마나 좋아"
"최사장. 그 말 진짜야 그런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거야?"
" 부동산 안사장이 그러대. 개발 계획 중이라고"
이모부는 주위의 밭들도 전부 개발될 거라는 정보를 지인에게서 듣고 먼저 건물을 지으려 한 것이다. 몇 년이 지나도 그곳엔 논 밭이 그대로 있었고. 건물은 이모부가 지은 3층짜리 빈 상가뿐이었다. 확인해 볼 생각은 왜 모두 해 보지 않는 것일까. 그 건물은 여름이연 넘실거리는 초록바다위 외딴섬처럼 보이곤 했다
엄마는 엄마와 같은 과정을 겪고 있는 이모를 그냥 둘 수 없었다. 그것이 석희에게 또 한 번의 어려움을 줄 수도 있다는 건 더욱 생각 못 했다. 엄마는 당연히 모른다. 그 괴로움을 직접 감내하지 않았으니까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온다더니 건물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던 이모부는 운전 중 사고를 냈다.
사람이 죽었다. 합의금이 필요했고. 더 이상 융통 할 돈이 없던 이모는 조카인 석희의 집이 작은 희망이었다.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누군가에겐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징검다리 노릇을 엄마가 하고 있는 것이다.
남 부럽지 않게 살던 이모의 애절함과 엄마의 다그침에 석희는 보증을 섰다. 안 해줘도 불편하고 해 줘도 불편한 이 관계가 지겹다. 혈연은 전생의 악연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남편 진혁에게 보증 문제는 비밀이었다.
이 일은 한 동안 석희의 기억에서 사라졌었다. 평온한 시간은 무더위가 한껏 기승을 부리던 때에 끝이 났다.
머리를 내리누르는 듯한 뜨거운 여름 한낮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3층 계단을 올라선 집배원 아저씨가 석희집을 찾았다.
"우체국 등기요"
'등기 올 곳이 없는데......'
ㅇㅇ은행에서 온 등기 우편을 뜯어보고 석희는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이모에게 아무리 전화를 해 봐도 받지 않는다.
엄마에 이어 이모까지 두 자매가 석희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숨통을 꽉 쥐고 살 수 있을 만큼만 풀어주는 건지도 몰랐다. 3주 뒤인 8월 24일까지 원금 상환이 안 되면 석희가족의 누울 자리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엄마, 나 좀 살자. 나한테 어떻게 이래. 엄마 빚 갚아 준 것도 모자라 이모 빚까지 갚으며 살아야 하는 거야. 어떻게 이러냐고?"
"석희야, 엄마가 미안해. 이 일을 어쩌냐?
전화너머 엄마의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석희에겐 들리지 않는다. 원망만 더욱 가중될 뿐이다
"이모, 밀린 이자라도 먼저 갚으면 원금 상환 미뤄줄 수 있다고 했어. 그거라도 제발 해줘요"
"석희야, 이모가 최선을 다 해 볼게"
이모가 하겠다고 했던 최선은 석희에게 닿지 않았다. 엄마에게 화를 내 봐도 이모를 찾아 가 호소를 해 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얼마 뒤 들려온 이모부의 자살 소식에 석희는 원망할 사람도 잃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살고자 이모는 평생 해보지 않은 보험 영업일을 시작했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이모의 안중에 석희가 보이지 않았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석희는 적금을 깨서 밀린 이자를 우선 갚고 원금은 다달이 갚아 나가기로 했다. 이모와는 연을 끊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이모의 빚을 가져오고 이모를 버렸다. 같은 상황일지라도 한쪽에 더 냉정했던 이유는 엄마가 아니라 이모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갚아나가야 할 돈이 있으니 보증 문제를 석희는 진혁에게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진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지만 사실을 말하기로 했다.
행복하려고 발버둥 쳐봐야 늪에 빠진 것처럼 점점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진짜 행복임을 석희는 몰랐다.
행복은 노력순이 아니었다. 정해진 운명이라 석희는 믿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