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아빠의 엄마 얼굴을 모른다. 아빠를 낳고 산욕열로 시름시름 앓다 아빠에게 젖 한번 물리지 못하고 이별했다. 아빠는 심청이처럼 마을의 동냥젖으로 살았다. 할아버지는 가난하지만 종갓집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홀아비로 오래 있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고, 바로 지금의 할머니와 결혼해야 했다. 아빠는 아빠의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내 인생 책으로 쓰면 10권은 나와"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생각난 듯 말하려다가도 바로 멈추는 이유는 새어머니에 대한 예의 일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아빠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15살 그 해 겨울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사촌형이 있는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고 했다. 더 이상 그 시골에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공사판에서 벽돌 나르기, 시장에서 짐 나르기, 신문배달, 안 해본 일 빼고는 다 해 봤다는 아빠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23살에 이용 학원에 등록했다. 기술이 있어야 엄마와 뱃속 석희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책임감이었다. 공사판에서 만난 막내 외삼촌은 아빠보다 한 살 위였다. 삼촌은 가족 없는 아빠를 종종 집으로 데려가 함께 밥을 먹었단다. 그 집에서 아빠는 엄마를 보았다.
처음 엄마를봤을 때부터 엄마가 좋았단다.
'첫눈에 반 하다"라는 말을 아빠는 믿고 있다.
당신이 그랬으니까. 가끔 싸우고 가끔은 미워도 아빠는 엄마 없는 삶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한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엄마가 돌아올 자리를 아빠는 언제나 꼿꼿이 지키고 있었다.
엄마에게 죽을 고비를 안겨주고 석희가 태어난 그다음 날! 아빠는 이용사 시험 합격을 통보받았다.석희를 안고 있는 아빠의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짧게 깎여 있었다. 실습 시험에서 서로의 머리까락을 내주어야 했으므로.
남의 집 귀한 딸을 데려다 소박한 결혼식도 없었고, 부부임을 증명해 줄 혼인신고도 없이 고생만 시키다 석희가 태어났다. 석희의 출생신고가 1년 미뤄진 것은 엄마의 나이가 어리기도 해서 이지만 혼인신고가 늦어서이기도 했다.
석희가 막 세 살이 되던 봄 아빠는 엄마를 데리고 시골집을 찾았다. 정 붙일 곳 없는 고향 집이었지만 아빠 역시 그 가난한 종갓집 종손이었으니 핏줄 인사는 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종손의 첫 자식이 아들이 아님에 할아버지는 실망했지만 그 길로 할머니는 혼례 준비를 하였다.마당에 볏짚 돗사리를 넓게 깔고. 6첩 병풍을 세워 볼품없는 초가집을 가렸다. 엄마는 혼례상을 가운데 두고 아빠와 하는 맞절로 부부가 됨을 집안 어른들께 인정받았다. 친정 식구 한 명 없이 엄마는 한복에 면사포를 쓴 신식도 구식도 아닌 결혼식을 하였다. 석희가 본 결혼사진 속 마을 어른들은 모두 거나하게 취해있었는데 사람들의 발 밑에 뒹구는 막걸리 병들이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사진 속 어린 석희는 엄마 아빠 옆이 아닌 사진 왼쪽 끝 태어나 처음 본 고모 치마폭 앞에 서 있었다.
곱게 화장한 엄마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빚을 모두 청산하고 엄마가 돌아온 그다음 해 아빠는 점점 말라가고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아빠, 병원 좀 가봐요. 얼굴빛이 너무 좋지 않네"
"아픈 곳 없는데. 살이 빠져"
"그러니까 병원을 가보라고요"
며칠 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석희야, 아빠 검사한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보호자 면담 좀 하자네. 엄마 혼자 못 가겠어. 네가 좀 가줄래?"
엄마는 늘 이랬다.
아빠에게 암이 생겼다.위암이었다.
엄마대신 빚쟁이들을 마주 할 때와는다른 떨림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결과를 듣고병원을 나서며 진혁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전화를 했다. 울음을 참으려고 애썼지만 진혁의 목소리가 스위치를 눌러 버렸다. 사색이 되어있는 엄마를 진정시킬 겨를이 석희에게도 없었다. 진혁의 차분한 냉정함이 간절히 필요했다
아빠 가게에 도착하니 손님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아빠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석희와 진혁 엄마까지 온 걸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아빠는
"잠깐 기다려. 이따 얘기하자. 무슨 큰일이라고 다들 몰려왔어?"
"......"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엄마는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엄마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 주는 듯했다.손님을 웃으며 보내는 아빠에게 석희가 먼저 말을 꺼낸다.
"아빠, 일 그만하고 나랑 대학병원 좀 가요"
"...... 뭐가 안 좋다니?"
"가서 정밀 검사 해 보자"
아빠는 하던 일을 정리하시고 마치 시장 보러 가듯 석희 부부를 따라나섰다.
애써 담담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빠의 얼굴빛은 하얘졌다. 진혁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엄마를 포함한 네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 새어 나오는 엄마의 숨 죽인 한숨소리만 차 안 모든 사람의 심장에 가 박혔다.
의사는 초기에 발견한 것이 다행이라며 위치가 좋지 않아 위를 전부 드러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빠는 남의 일 얘기하듯이 무심하게 의사에게 말하고 진료실을 나왔다.그 길로 아빠는 손님이 기다린다며 다시 가게로 향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빠의 검사. 입원. 수술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다른 곳으로 전이도 없었고 항암 치료만 제대로 받으면 되었다.
위를 전부 잘라낸 후 꼬인 장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고통은 극심했다.
"석희야, 아빠 많이 고통스러워해 어떡하지?"
새벽 두 시였다.
"엄마. 간호사한테 얘기해야지. 진통제 달라고 해"
"주사 맞았는데 소용이 없어. 네가 좀 와봐"
"내가 간들 무슨 방도가 있어? 좀 기다려봐요"
"아빠가 저렇게 아파하는데?"
석희는 남편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모두 잠들어 있는 깊은 새벽 병원을 찾았다.
아빠는 많이 진정되어 있었다. 잠들어 있었다.
퇴원한 아빠의 신경은 날카로워졌고, 좋아하던 술, 매운 음식은 먹을 수 없었다. 저염 식사를 하면서 점점 더 고약해졌다. 평생 보이지 않던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빠에게 정성을 다했다. 지금껏 석희가 보아온 부부의 역할이 바뀐 듯했다. 마음껏 먹지 못해 생기는 아빠의 고약은 점점 심해졌고. 엄마의 정성도 차츰 사그라들었다.
"네 아빠 때문에 내가 못 살겠다"
엄마는 이렇게 말하고 아빠는 투정은 부리면서도
"엄마 없이 못 산다"라고 한다.
여전히 엄마는 아빠의 변덕을 받아내며 곁에 있다.
상처를 줄 용기, 그 상처를 받아낼 용기가 있는 두 사람은 부부였다. 지겹지만 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