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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연 Nov 17. 2024

본질

이기적가족

"차진혁, 얼굴이 왜 그래? 한숨도 못 잔 사람 같네. 술이나 한잔 하자 회사도 어수선한데 집구석에 들어가 봐야 머리만 더 아프더라고!"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 해, 다음에 내가 한 잔 살게"


퇴근 후 붙잡는 동료 김세훈의 제안을 거절한 진혁의 발걸음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집으로 가야 할지. 어디 가서 혼자 술이나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운전조차도 하기 싫어 버스를 기다리다 한 정거장만 걷자 한 것이 한 시간째 걷고 있다.


"휴, 덥다"


손 부채질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이마를 타고 귀 옆으로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낸다. 땀에 젖은 티셔츠가 몸에 붙어 움직임이 불편하다. 이러다 집까지 걸어갈 판이다. 진혁의 마음이 우울한 탓인지 찐득한 땀 냄새를 풍기며 옆을 스치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도 어두워 보인다.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시끄럽고 먼지 많은 이 뜨거운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다.


'세훈이랑 술이나 마실걸 그랬나?'


집이 가까워질수록 진혁의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말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할 말은 못 하고 성질만 내 버린 것이 후회된다.


어젯밤 석희와 한 끝내지 못한 대화의 여운이 머릿속을 맴돈다.


"자기야, 사실 내가 이모 보증을 서 줬어"


고개도 들지 못하고 울며 말하는 석희의 얼굴은 야위어 보였다. 눈은 퀭하지만 부어있고. 볼은 움푹 파였다.


"왜 꼭 일이 터진 후에 얘기하는 거야? 해결할 수 없게 되니까 뒤처리해 달라는 거야?"

"내가 다시 취업할 거야. 예서 어린이집 갈 나이 됐으니까 다시 일하면 돼. 내가 갚아 나갈 수 있어"


석희는 말은 이렇게 뱉어내지만 다시  사회생활을 할 생각만으로도 겁이 난다.  예서를 핑계 삼아  집에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지금 너 일 하라고 하는 말 아니잖아. 나랑 상의를 했어야지 뭐든 맘대로 일은 벌여놓고 나중에 말하는 게 문제라는 걸 왜 몰라?"


퍼붓는 진혁의 말과 낯선 화난 표정.

석희는 대꾸 한마디 하지 못한다.  


사실 진혁이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전부 보증 때문은 아니다. 진혁도 석희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 며칠째 우울한 석희의 눈치를 보느라 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늘 석희의 우울의 이유를 알아버렸고, 그 이유가 기가 막혀 쏟아져 나오는 화를 제어하지 못했다.




회사가 어려워졌다. 월급이 계속 안 나올 수도 있고 잘릴 수도 있다. 더 상황이 심각해지면 회사 자체가 부도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우뚝 솟아났다.

두 달 전엔 모아놓은 비상금을 탈탈 털어 월급인척 통장에 넣어 줬고. 한 달 전 월급은 동생 수혁에게 융통해서 주었다. 하지만 이번달도 회사 사정은 나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석희에게 말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빚은 어떻게 갚고, 생활은 뭘로 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하다.




진혁과 석희는 20살 대학 1학년때 만났다.

석희는 이목을 끄는 예쁘고 여성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진혁은 석희와 하는 대화가 즐거웠고 같이 있으면 맘이 편했다. 석희에겐 자신을 꾸며 보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석희 역시 그런 듯했다.

오히려 다른 여학생들과 달리 첫 만남에도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고 내숭이란 게 없는 털털한 석희에게 더 맘이 갔다.


석희는 진혁이 전역할 때까지 기다렸다.

당연히 졸업도 진혁보다 빨랐다. 작은 통신 회사에 취업한 석희는  사회에서 먼저 자리를 잡았고 진혁이 취직을 하고 1년 뒤 결혼했다. 20대 청춘들이 말하는 불꽃같은 사랑은 이들에게 없었다. 오래 묵은 편한 감정이 결혼까지 이끌었을 이다. 결혼 생활도 석희의 친정 문제만 아니라면 별 탈 없이 유지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의 회사문제는 진혁 석희 예서 세 가족의 생존 문제였기에 진혁은 속이 시끄럽다.


'아버지께 도와달라고 해야 하나'

'아니. 석희와 얘기를 해 봐야 하는데'

'서둘러 이직을 해야 하는 게 맞겠지?'


생각이 깊어지니 이윽고 석희의 친정 식구들이 원망스러워졌다. 우리 가족을 좀 내버려 두면 좋겠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석희가 안쓰럽다가도 미워지고, 미웠다가도 불쌍하다.

하지만 오늘은 얼굴 보는 것조차도 힘이 든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불어주면 좋으련만, 여름밤더위는 가실 생각이 없고 콧속으로 들어가는 습한 공기마저 진혁의 마음처럼 무겁다.

하루하루가 참 고단하다. 갑자기 딸 예서의 활짝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석희는 진혁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두 번씩이나 남의 빚을 갚아야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지은 죄 없이 죄인이 된 것 같다.

가족이라는 연결고리를 끊어내지 못하는 게 죄라면 석희는 할 말이 없는 죄인인 것이다.

이렇게 주눅 들어 살다 간 언젠가는 숨도 못 쉴 것 같았다. 엄마나 이모를 감싸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진혁의 이해를 바라는 맘은 어쩔 수 없다. 그렇지 않고는 진혁은 석희와는 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진혁은 물론이고 시댁 어른들을 밝은 얼굴로 볼 자신이 없다. 석희의 친정 식구들과 관련된 일을 알게 될까 싶어 눈치를 살피는 자신의 모습이 더 어색하다.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니잖아? 왜 모든 일이 내 잘못인 듯이 생각하고 있는 거지. 주눅 들지 마'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엄마 그리고  이모 그들이 단 한 방울 일지라도 피로 연결되어 있는 석희의 가족임은 변하지 않는다. 진혁에게 변명을 할 수도 누구에게 책임을 미룰 수도 없다.


"언니 예서 좀 봐줘요 오늘 면접 있는데 어린이집 자리가 아직 나오지 않아서 그래요 두세 시간만 부탁해요"


최대한 단정한 옷을 골라 입고 옅은 화장을 한 석희가  이웃에 사는 민정에게 예서를 부탁한다.

석희의 얼굴은 면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더위 때문인지 상기되어 있다.


민정에게 예서를 맡기고 면접을 보러 다니는 석희는 자꾸 눈물이 난다. 불편한 옷을 입고 어울리지도 않은 화장을 한 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 아무 일자리나 구하는 것이 못 마땅하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겁난다. 그보다 예서를 떼어놓는 것이 더 힘들다.


석희와 진혁은  각자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본질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가족!

가족으로 얽혀있지 않다면 행하지 않았을 행동과 한 톨 쌀알만큼의 고민거리도 되지 않을 생각으로 괴로워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가족 없이 혼자라면 월급이 나오지 않는 것이 무슨 큰 걱정거리가 되겠는가.  가족이 아니라면 보증의 책임을 왜 지겠는가 말이다.


석희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또 다른  가족을 끊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걱정을 자신의 삶에 더 이상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자기 어깨 위의 짐을 진혁에게 덜어내고 있다는 미안함을 지울 수 없다.

숨어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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