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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빈 방에 대고 소리쳐!

눈 보러 가자.

by 류지연

"ㅇㅇ아!, ㅇㅇ아! 눈 온다. 빨리 나와 눈 보러 가자"

출근 준비하다 말고 남편이 아이들의 빈방에 대고 소리친다.


"왜 그래, 애들도 없는 빈 방에 대고 뭐 해?

"눈 오면 같이 나가서 눈 보고 그랬는데......"

"아이들 어렸을 때가 그리워?"

"어, 그리워"

"뭐가 그립냐? 편하기만 하고만!"

웃으며 물었지만 남편의 어이없는 행동에

아침상을 물리고 설거지하던 내 맘 한편도 스르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주책이야 얼른 준비하고 출근해"

첫눈 오는 오늘 아침 우리 집 분위기는 이랬다.


2024년 5월 두 아이를 독립시키기로 했다.

작은 아이가 한 달 먼저 공부를 핑계로 나가고, 17살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해 오던 큰 아이는

사생활이 필요하다고 했다.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긴 했지만 남편과 나는 큰 고민 없이 그러자고 했다.

20살이 넘은 성년의 자녀들과는 한 집에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가끔 보아 생기는 그리움이 곧 화목이라 생각했다.

남편도 20살에 나와 살았고, 나도 역시 비록 부모님 집 근처이지만 20살 때부터 나와 살았다.

아이들을 끼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난 한 번도 아이들 없는 집이 허전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는데, 이 아침은 잠깐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눈만 오면 눈 밭에 아이들을 굴리던 그때가 생각났다.


남편은 굉장히 계획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가을 낙엽과 겨울 눈은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드는 마법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년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얘들아, 지금 속초에 눈 온단다. 우리 뜰까?"

"지금? 진짜"

"아빠, 가자"

뉴스를 보다 남편이 갑자기 한 말이다.

내가 말릴 겨를도 주지 않고 입고 있던 옷에 주섬주섬 겉옷을 걸친다.

'그래 뭐! 내일 토요일이니까?'

나도 갑자기 신이 난다.

우리가 출발한 시간은 저녁 8시 30분

밤을 달려 11시가 넘어 도착했다. 관광지여서 그런지 속초는 아직 환했다.

기대했던 만큼의 눈은 보지 못했지만 검푸른 겨울 밤바다를 보고, 사진도 찍고, 편의점에서 간식도 먹었다. 그 밤 우리 가족은 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나와 남편은 90년대 노래를 목이 쉴 정도로 크게 불렀다.

90년대 노래를 2000년대 태어난 딸아이가 왜 잘 아는 걸까? 아무튼 그 좁은 공간에서 엉덩이 들썩들썩!

군에 가 있던 큰 아이에게 미안했지만 이렇게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고,

귀가한 시간은 새벽 4시가 넘어서였다.


그 밤의 즉흥적 일탈로 토요일 오전은 우리에겐 없었다.



11월 27일

관측이래 11월에 가장 눈이 많이 온날!

겁도 없이 차를 끌로 나간 친구와 나는 분당-인천 도로에서 6시간을 있었다.

오늘 차창 밖의 풍경은 감탄과 두려움 희극과 비극이 교차했다.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미끄러지는 타이어는 두려웠고,

온통 하얀 깨끗한 세상이 경이로웠지만 사고 난 차량으로 도로는 마비되었다.

차 안은 어땠을까? 상상해 보라.

화장실이 간절히 필요했다. (고속도로를 통제하는 바람에 다시 시내로 돌아와 주유소를 찾았다)

집에 갈 수 있을까? 걱정되었고, 그 나중은 배고픔의 고난이었다.

분당-인천 구간이 오늘은 동남아 보다 멀었다.

사고 없이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어서 감사할 뿐이다.


눈 내리는 겨울은 언제나 하나씩 추억을 만들어 준다.

그 추억이 언제나 즐거운 추억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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