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유감
뉴스 유감
이전에도 그랬지만 요새는 정말 뉴스를 보지 않으려고 애쓴다..
같은 내용의 뉴스라고 해도 포털이나 뉴스 방송의 헤드 타이틀에 오르는 제목들은 정말 원초적이다.
행여라도 아이가 이 뉴스 제목이 뭐냐고 묻는다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새로운 소식을 빠르게 알려주는 게 뉴스의 원래 본질이라면,
요즘의 뉴스는 최악들을 더 최악으로 보이게 가공해서 게재하는 것 같다.
뉴스의 꼭지만 주르륵 훑어보면 단 하나의 단어로 귀결된다..
암담.
세상은 이미 기후변화로 최악의 열병을 앓고 있고,
그 이유로 거대한 태풍이 몰려오고 홍수가 일어나고,
엄청난 화재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아무 인과관계도 없이 불특정의 사람들을 향하여 흉기를 휘두르는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이런 불안감에 편승하여 나도 그럴 것이다 사전에 고지를 하는 광인들도 넘친다.
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청년들은 빚더미에 올라타서 서핑을 한다.
어떤 연예인이 어떤 연예인을 향하여 날 선 공방을 벌인다는 뉴스는 애교 정도다.
뉴스의 내용을 간추려 읽어보면 세상은 이미 정의의 편은 존재하지 않는 아마겟돈에 들어간 것 같다.
그런데.
공항을 가보면 여행을 가려는 사람들이 흘러넘친다.
휴가지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고 유흥가에도 사람들은 늘 붐빈다.
마치 조만간에 세상이 암흑의 혼돈으로 들어갈 것처럼 실컷 뉴스를 늘어놓다가,
그다음 채널에서는 어떻게 잘 챙겨 먹어야 오래 사는지를 앞다투어 토론하고,
그다음 채널에서 앞 채널에서 토론하던 건강식품을 열심히 판매한다.
그리고 그다음 채널에서는 대충 이름을 들어보았던 유명인 누군가가 세계 방방곡곡을 돌며 멋지고 맛있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며 어서 가보라고 종용한다.
이제 뉴스는 정보의 홍수가 흘러넘치는 세상에서 최악과 위악과 위선을 잘 버무려 내놓는 레시피로 자리를 잡은 듯싶다.
한편으로 생각한다.
어릴 적 세상이 과연 평온했었나 하고.
오히려 그때는 더 심했었지 않나 하고.
서울 상공에도 늘 방공 서치라이트가 오락가락하고,
여름에는 걸핏하면 밤중에 단전이 되고,
항상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벌어질 것처럼 늘 살벌하던 라디오 방송들.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하는 일상의 교육 중 하나는 늘 ‘어디 가서 말조심해라’ 였다.
물론 지금도 말은 조심해야 하지만 그때의 말조심이란 지금과는 달라서,
잘못 말을 하면 자칫하면 경찰에 끌려갈 수도 있을 정도의 살벌함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보다 훨씬 부족했다.
물도 부족하고 연료도 부족하고.
겨울에 연탄이 떨어지면 전전긍긍하며 이웃집에 연탄을 빌리러 가야 할 정도로.
그때도 불공평했다.
다들 연탄 쟁여놓기에도 애면글면하던 시기에도 기름보일러로 한겨울에도 반소매로 집안을 돌아다니던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오히려 그 시절에는 부자들이 가난한 서민들에게 말도 행동도 함부로 해도 그렇거니 받아들이는 시대였으니까.
지금은 외려 실제는 그렇지 못한대도,
모두가 평등하고 공평해야 한다는 의식이 자리 잡아서 실생활과는 별개로 우리는 모두 공정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그것이 궁극의 목표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일부 주식투자나 가상화폐 같은 것으로 타고난 팔자를 뒤바꾼 사람들도 없지 않으니까.
짐작하면 오래전 석기시대에도 마찬가지였을 거라 생각한다.
내일을 알 수 없어 불안하고 힘센 종족이 더 많은 것을 빼앗아가는 게 당연하고,
공동체의 보장보다는 힘이 우선인 사회에서 뭐 그리 희망적인 게 있었을까.
현대의 세상에서는 더 작은 일이라도 더 크고 더 과장되게 표현하고,
그런 불안감을 내세워 그것으로 먹고사는 조직들이 있어서 더 심하게 와닿는 게 아닐까.
불안은 자본주의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에너지다.
이런저런 불안감들로 인하여 이익을 보는 집단이 생기게 마련이니까.
어느 한 축이 불안감으로 인해 크게 손해를 보고 어렵게 변한다면,
그건 반드시 대척점에서 이익을 보게 되는 새로운 축이 등장한다는 뜻이니까.
차라리 뉴스를 안 보는 게 정답이다.
정말로 긴급한 일이라면 재난문자가 올 것이고,
어차피 수천만이 동시에 보는 뉴스가 개개인에게 효용성은 적을 테니까.